오래도록 꿈꿔온, ‘아침’이 있는 삶
부산에서 나고 자란 이정란 씨는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한 후 십 년 동안 유치원교사로 일했다. 결혼과 출산으로 일을 그만둔 것도 잠깐, 그 후 새마을문고, 부동산중개업, 독서실 운영 등 계속해서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며 부지런히 살아왔다. 오래도록 귀촌 귀농을 꿈꾸어온 남편을 따라 서하면 거기마을로 들어와 산 지 이제 7년째. 느긋하게 눈뜰 수 있는 아침과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 그리고 하루 네 시간 <LH함양서하어린이도서관>에서 일하는 시간을 사랑한다는 그의 삶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본다.
“나에게 서하란?
게으르게 살아도 괜찮은 곳이에요.”
이정란 씨 부부가 살고 있는 서하면 거기마을 풍경.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상당히 ‘애매한’ 시간이 있다면 오후 두세 시가 그렇지 않을까. 하루치 에너지의 상당량을 이미 써버려 그때쯤엔 몸도 마음도 늘어지기 예사다. 커피나 녹차를 홀짝이며 카페인을 주입해봐도 노곤함은 쉬이 가시지 않고, 마치 누가 붙잡고 있기라도 한 듯 시곗바늘마저 더디게 흘러간다.
그런데 날마다 그 시간을 기다렸다 씩씩하게 집을 나서는 사람이 있다. 아침부터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다. 시골에 내려오면서 알람 없이 느긋하게 눈을 뜨고, 그러고도 한참을 누운 자리에서 꼼지락거릴 자유를 얻었기에 ‘세 시 출근’이 가능하다는 것. 서하면 거기마을 주민이면서 <LH함양서하어린이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부산댁’ 이정란 씨의 이야기다.
아이들 속에서 피어난 ‘부산댁’의 청춘
“서하에 들어온 지 칠 년쯤 돼요. 남편이랑 왔죠. 아들들이야 다 커서 자기들 힘으로 살고 있고요. 처음 몇 년은 주말에만 왔다 갔다 하다가 삼 년 전에 남편이 퇴직하면서 완전히 정리하고 내려왔어요.”
1960년에 부산에서 태어난 이정란 씨는 귀촌 전까지 줄곧 고향에서만 생활해왔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도 부산에서 다녔다. 부모 품에서 벗어나고자 일부러 다른 지역의 대학에 지원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좀 엄격하셨어요. 놀다가도 해지기 전에는 꼭 집에 들어가야 했죠. 대학도 나가서 다니려면 먼저 호적을 파라고 엄포를 놓으셨고.(웃음) 아버지의 그런 성향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저도 그때는 딱히 다른 데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요. 오히려 나중에 그런 생각을 했지. 아, 그때 좀 나가서 살아볼걸.(웃음)”
교사를 꿈꾸던 그는 대입 성적이 그에 못 미치자 유아교육으로 전공을 바꾸어 진학했다. ‘차선’이긴 했지만 요즘 말로 “오히려 좋아”를 외칠 만큼 전공 공부가 재미있고 적성에도 잘 맞았다. 돈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거의 모든 교재를 직접 손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런 작업마저도 무척 신나게 했던 것으로 이정란 씨는 기억한다.
대학 졸업 후 유치원교사로 일하던 당시의 이정란 씨.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한 유치원에서 그는 30명의 아이를 맡았다. 신입이라고 특별히 배려해서 가장 인원이 적은 반을 준 게 그 정도였다. 게다가 직장에서는 학교에서 했던 것보다 더 정교하고 질 높은 ‘수작업’을 요구했다. 몇 날 며칠 바느질해서 만든 소품들로 인형극을 올렸는가 하면, 하드보드지에 직접 그리고 써서 만든 큰 동화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기도 했다. 철마다 무슨 발표회며 운동회까지 준비하려면 야근에 밤샘을 밥 먹듯 했다니, 한창 궁금한 것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은 이십 대 나이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깝지는 않았을까.
“그때는 그런 일들이 다 재밌었어요. 뭐 하나 끝내고 나면 성취감도 컸고요. 그래서인지 힘들다거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지금 돌아보면 유치원교사 할 때는 이게 직업이라거나 돈 벌기 위해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던 거 같아요. 그냥 매일매일 아이들 만나고 보는 게 좋았던 거지. 그리고 계속 일만 한 건 아니니까요. 슬쩍슬쩍 놀러도 많이 다녔어요.(웃음)”
여럿이 함께 써 내려간 감만2동 새마을문고의 ‘전설’
이십 대 후반에 현재 남편인 박위용 씨를 만나 결혼한 그는 둘째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아이 키우는 재미로 살다가 다시 바깥 활동을 시작하며 맡은 게 바로 ‘새마을문고’다. 단체 일은 처음이라 낯설었지만, 책을 매개로 한 봉사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어느 날 동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새마을문고에 회장이 없어서 해체될 지경이니 그 일을 좀 해주면 안 되겠냐고요. 일단은 하기로 하고 초반에 거기서 아이들 몇 명을 모아 글짓기 수업을 좀 했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공간을 정비해서 본격적으로 방과후교실을 운영했고요. 그때는 방과후수업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서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나면 갈 데가 없었거든요. 감만2동 새마을문고에서 미술, 글쓰기, 원어민영어, 한자 같은 수업을 강사 초빙해서 한다고 소문이 나니까 아이들이 엄청 몰려들었죠.”
당시에는 동사무소마다 새마을문고가 있었지만, 보통은 구석에 작은 책장 한두 개 놓여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에 비하면 감만2동 새마을문고는 규모가 컸다. 이정란 씨는 회장을 맡으면서 그 점에 주목했다. 이곳을 잘만 활용하면 학교 수업 후 길 위를 헤매고 다니거나 기껏해야 게임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값진 공간이 되어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아이디어는 큰 ‘히트’를 쳐서 멀리까지 소문이 퍼져갔다. 프로그램 신청자를 선착순으로 받는 날이면 아침부터 엄마들이 문고 앞에 길게 줄을 설 정도였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뒤에서 열심히 움직여준 새마을문고 자원봉사자들과 문고 일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공무원들이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지금처럼 방과후수업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 이정란 씨(뒤에 선 어른들 중 왼쪽에서 아홉번 째)는 감만2동 새마을문고를 활용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아이들과 함께했다.
“그때 같이 일한 엄마들하고 마음이 진짜 잘 맞았어요. 그 일이 다 아무 대가 없이 자기 시간 빼서 하는 봉사였거든요? 그런데도 다들 너무 열심히, 재밌게 하는 거에 제가 힘을 많이 받았죠. 또 동사무소뿐 아니라 관할 구청에서도 우리가 아이들 데리고 어디 소풍이나 견학 간다 하면 공무원 출퇴근용 차를 지원할 정도로 협조를 잘 해줘서 참 고마웠어요.”
“남편 따라 왔지만 120퍼센트 만족해요”
유치원을 십여 년 다녔던 그는 새마을문고 일도 십 년을 채웠다. 그 후로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몇 년간 부동산을 운영했고, 한때는 독서실 사장님이 되어 공부하는 학생들과 ‘취준생’들에게 청결하고 조용한 공간을 제공하며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공식적인 일과 직함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사적인 모임이며 활동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 모든 것을 다 접고 시골에 들어오기까지는 남편 영향이 컸다. 남편은 부산에 살 때도 주말마다 텃밭에 가서 살던 사람이다. 한 2백 평 되는 땅을 일구어 계절마다 신선한 채소를 가득 실어와 아내에게 안겼다는데.
“처음 몇 번은 좋았죠. 점점 처치 곤란이 돼서 그게 문제지.(웃음) 그 무렵에 같은 아파트 살던 친구 부부가 서하면 은행마을로 귀농을 했어요. 그에 자극을 받았는지 남편이 퇴직 후 정착할 곳을 본격적으로 알아보더라고요. 주말마다 저랑 같이 지리산 주변이고 어디고 다 다녔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거기마을 집이랑 땅이 부동산사이트에 올라온 걸 본 거죠.”
거기마을은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는데 이정란 씨 부부의 거처는 음지마을에 속한다. 서하면 소재지에서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나오는 그곳은 터가 널찍하고 풍광이 아름다워 최근 귀촌 귀농인이 많이들 찾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곳에 7년이나 앞서 자리를 잡았으니 이 부부의 눈이 밝았다 해야 할까, 운이 좋았다 해야 할까.
집을 사놓고도 그때는 남편이 아직 퇴직하기 전이라 주말에만 서하로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7백 평 남짓한 땅에 사과나무가 100여 그루나 되어서 일이 많았다. 사과 농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다행히 먼저 귀농한 친구의 도움을 받고 이웃들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하면서 부부는 그해 가을에 사과를 수확하는 데 성공한다.
“모양은 좀 빠져도 약을 별로 안 쳐서인지 딴딴하고 달더라고요. 식구들끼리 먹기엔 감당이 안 되어 한 번 와서 수확할 때마다 오십 박스씩 부산에 가져가 지인들에게 팔고 그랬어요. 사과는 일이 정말 많아서 힘들어요. 우린 약을 별로 안 치는데도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작년까지만 하고 올해부터는 안 해요. 대신 남편이 거기다 고추를 심었죠.”
농사를 전담하는 남편 박위용 씨가 고추밭에서 일하는 모습.
사과만큼은 아니라 해도 고추 역시 품이 많이 드는 작물이다. 집 옆 텃밭까지 치면 농사일이 꽤 많기에 이를 전담하는 남편은 하루 대부분을 밭에서 보내곤 한다. 일손이 급할 때는 물론 이정란 씨도 거들지만 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보조’일 뿐이어서 마음이 편하다. 대신 그는 꽃과 식물로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책임지고 있다고.
“솔직히 농사는 우리가 아무리 용을 써도 여기 분들을 못 따라가요. 남편이 열심히 하긴 하지만 자기 속도로 천천히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일하니까 버티는 거지. 그래도 그 사람은 노상 밭에 있으니까 동네 분들이 좋게 보시더라고요. 아침에 일하고 있으면 뭐도 막 갖다 주시고. 반대로 저한테는 그러시죠. 부산대기는 늦게 일어나고 게으르다고.(웃음) 그렇게 생각해주시니까 오히려 저는 편해요. 아침을 느긋하게 보낼 수 있는 지금이 저한테는 정말 좋거든요.”
‘게으른’ 자의 ‘꽉 찬’ 하루
스스로 게으르다고 말은 하지만 그이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빈 구석이 별로 없다. 집을 빙 둘러싼 정원에는 그의 정성 어린 손길에 의해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하다. 높낮이와 색깔을 달리한 꽃들이며, 가늘게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 줄기며, 여기저기 놓인 투박한 도자기들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놓인 게 없어 보인다.
정원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나면 도서관으로 향할 시간이다. <LH함양서하어린이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 지 2년째. 새마을문고 회장을 할 때도 느꼈지만 그는 책과 아이가 있는 환경을 사랑한다.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날마다 어딘가 갈 곳이 있다는 것도 왠지 든든하고 마냥 좋단다.
“도서관은 평일에 오전 열한 시부터 오후 일곱 시까지 열어요. 세 시까지는 다른 분이 근무하고 그 이후부터는 제가 하죠. 처음엔 책이 약 천 권 정도 있었어요. 대부분 성인이 보는 책이었고요. 지금은 전체 권수가 배 이상 늘었고, 특히 아이들 책을 많이 들였어요. 그래서인지 이용자도 조금씩 늘더라고요.”
송계마을 임대주택 단지에 있는 <LH함양서하어린이도서관>. 이정란 씨는 이곳에서 2년째 사서로 일하고 있다.
도서관이 처음 문을 연 작년에는 쌓여 있는 책 정리하고 일일이 바코드 작업하는 게 사서들의 주된 업무였다. 새마을문고에서 오래 활동한 이정란 씨에게는 익숙하고 쉬운 일이었다. 다만 책의 들고남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린이도서관으로 정식 등록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그는 개관한 직후에 함양군에 그 일을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이곳은 비로소 이름만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갖춘 ‘어린이도서관’이 되었다.
“어린이도서관으로 등록되어야만 중앙도서관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거든요. 그게 안 되면 누가 언제 무슨 책을 빌려 가서 언제 반납했는지 전부 손으로 적어야 해요. 불편한 건 둘째치고 그런 방식으로는 관리가 잘 안 되겠죠.”
그가 이 일을 하는 첫째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행복해서”다. 그러나 개인의 만족을 떠나 “마을에 도서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아이들이 모여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곳,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와 함께 책을 고를 수 있는 곳,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와서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있음으로써 모두의 삶의 질이 높아지지 않겠느냐고.
그러하기에 이정란 씨는 혹여 누군가 “애들 몇 명 온다고 도서관을 하냐”며 툴툴거리면 오히려 이렇게 말해준다. 한 명이 오더라도 도서관은 있어야 한다고. 책 읽는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직접 와서 보면 당신의 생각도 달라질 거라고.
책 읽듯 살아가는 지금이 좋다
책을 읽는 것과 시골에서 사는 것. 이정란 씨에게 이 둘은 참 닮았다. 뭔가에 쫓길 필요 없이 내 속도에 맞출 수 있고, 싫은 것 대신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도시에서는 그러질 못했다. 내 의사나 기분과는 무관하게 언제나 뭔가를, 그것도 빨리빨리 해야만 했다. 가야 할 곳과 만나야 할 사람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착착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까.
서하면 거기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그런 빡빡한 일상에 금이 가고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는 데서 이정란 씨는 잔잔하고 조용한 행복을 느낀다.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읊조린다. 늦게 일어나도 괜찮은 삶, 억지로 이루기보다 자연스럽게 되어가는 삶, 하루에 네 시간 정도는 책과 아이들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일하는 지금의 삶을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오래 꿈꿔온 것을 이루었으니 이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하루 네 시간 사서로 일하는 틈틈이 정원을 가꾸고 돌본다는 이정란 씨. 느긋하고 게으른, 그러나 꽉 찬 ‘시골의 삶’에서 그는 잔잔한 행복감을 느낀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함양군 서쪽 아래에 자리한 서하면. 사시사철 꽃과 나무와 물이 아름답다고 하여 화림동 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에는 오래도록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 삶의 다른 길을 찾아 걸어들어온 귀농 귀촌인들, 최근 이주해온 젊은 부부와 청년들도 있습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는 이처럼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서하를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서하다움'이란 큰 그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자 합니다.
인터뷰 및 글_자야 jayams@naver.com
사진_김한범 bombbug@gmail.com
오래도록 꿈꿔온, ‘아침’이 있는 삶
부산에서 나고 자란 이정란 씨는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한 후 십 년 동안 유치원교사로 일했다. 결혼과 출산으로 일을 그만둔 것도 잠깐, 그 후 새마을문고, 부동산중개업, 독서실 운영 등 계속해서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며 부지런히 살아왔다. 오래도록 귀촌 귀농을 꿈꾸어온 남편을 따라 서하면 거기마을로 들어와 산 지 이제 7년째. 느긋하게 눈뜰 수 있는 아침과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 그리고 하루 네 시간 <LH함양서하어린이도서관>에서 일하는 시간을 사랑한다는 그의 삶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본다.
“나에게 서하란?
게으르게 살아도 괜찮은 곳이에요.”
이정란 씨 부부가 살고 있는 서하면 거기마을 풍경.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상당히 ‘애매한’ 시간이 있다면 오후 두세 시가 그렇지 않을까. 하루치 에너지의 상당량을 이미 써버려 그때쯤엔 몸도 마음도 늘어지기 예사다. 커피나 녹차를 홀짝이며 카페인을 주입해봐도 노곤함은 쉬이 가시지 않고, 마치 누가 붙잡고 있기라도 한 듯 시곗바늘마저 더디게 흘러간다.
그런데 날마다 그 시간을 기다렸다 씩씩하게 집을 나서는 사람이 있다. 아침부터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다. 시골에 내려오면서 알람 없이 느긋하게 눈을 뜨고, 그러고도 한참을 누운 자리에서 꼼지락거릴 자유를 얻었기에 ‘세 시 출근’이 가능하다는 것. 서하면 거기마을 주민이면서 <LH함양서하어린이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부산댁’ 이정란 씨의 이야기다.
아이들 속에서 피어난 ‘부산댁’의 청춘
1960년에 부산에서 태어난 이정란 씨는 귀촌 전까지 줄곧 고향에서만 생활해왔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도 부산에서 다녔다. 부모 품에서 벗어나고자 일부러 다른 지역의 대학에 지원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에 불과했다.
교사를 꿈꾸던 그는 대입 성적이 그에 못 미치자 유아교육으로 전공을 바꾸어 진학했다. ‘차선’이긴 했지만 요즘 말로 “오히려 좋아”를 외칠 만큼 전공 공부가 재미있고 적성에도 잘 맞았다. 돈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거의 모든 교재를 직접 손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런 작업마저도 무척 신나게 했던 것으로 이정란 씨는 기억한다.
대학 졸업 후 유치원교사로 일하던 당시의 이정란 씨.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한 유치원에서 그는 30명의 아이를 맡았다. 신입이라고 특별히 배려해서 가장 인원이 적은 반을 준 게 그 정도였다. 게다가 직장에서는 학교에서 했던 것보다 더 정교하고 질 높은 ‘수작업’을 요구했다. 몇 날 며칠 바느질해서 만든 소품들로 인형극을 올렸는가 하면, 하드보드지에 직접 그리고 써서 만든 큰 동화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기도 했다. 철마다 무슨 발표회며 운동회까지 준비하려면 야근에 밤샘을 밥 먹듯 했다니, 한창 궁금한 것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은 이십 대 나이를 그렇게 보내는 게 아깝지는 않았을까.
여럿이 함께 써 내려간 감만2동 새마을문고의 ‘전설’
이십 대 후반에 현재 남편인 박위용 씨를 만나 결혼한 그는 둘째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아이 키우는 재미로 살다가 다시 바깥 활동을 시작하며 맡은 게 바로 ‘새마을문고’다. 단체 일은 처음이라 낯설었지만, 책을 매개로 한 봉사라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동사무소마다 새마을문고가 있었지만, 보통은 구석에 작은 책장 한두 개 놓여 있는 게 고작이었다. 그에 비하면 감만2동 새마을문고는 규모가 컸다. 이정란 씨는 회장을 맡으면서 그 점에 주목했다. 이곳을 잘만 활용하면 학교 수업 후 길 위를 헤매고 다니거나 기껏해야 게임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값진 공간이 되어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아이디어는 큰 ‘히트’를 쳐서 멀리까지 소문이 퍼져갔다. 프로그램 신청자를 선착순으로 받는 날이면 아침부터 엄마들이 문고 앞에 길게 줄을 설 정도였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뒤에서 열심히 움직여준 새마을문고 자원봉사자들과 문고 일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공무원들이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지금처럼 방과후수업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 이정란 씨(뒤에 선 어른들 중 왼쪽에서 아홉번 째)는 감만2동 새마을문고를 활용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아이들과 함께했다.
“남편 따라 왔지만 120퍼센트 만족해요”
유치원을 십여 년 다녔던 그는 새마을문고 일도 십 년을 채웠다. 그 후로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몇 년간 부동산을 운영했고, 한때는 독서실 사장님이 되어 공부하는 학생들과 ‘취준생’들에게 청결하고 조용한 공간을 제공하며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공식적인 일과 직함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사적인 모임이며 활동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 모든 것을 다 접고 시골에 들어오기까지는 남편 영향이 컸다. 남편은 부산에 살 때도 주말마다 텃밭에 가서 살던 사람이다. 한 2백 평 되는 땅을 일구어 계절마다 신선한 채소를 가득 실어와 아내에게 안겼다는데.
거기마을은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는데 이정란 씨 부부의 거처는 음지마을에 속한다. 서하면 소재지에서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나오는 그곳은 터가 널찍하고 풍광이 아름다워 최근 귀촌 귀농인이 많이들 찾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곳에 7년이나 앞서 자리를 잡았으니 이 부부의 눈이 밝았다 해야 할까, 운이 좋았다 해야 할까.
집을 사놓고도 그때는 남편이 아직 퇴직하기 전이라 주말에만 서하로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7백 평 남짓한 땅에 사과나무가 100여 그루나 되어서 일이 많았다. 사과 농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다행히 먼저 귀농한 친구의 도움을 받고 이웃들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하면서 부부는 그해 가을에 사과를 수확하는 데 성공한다.
농사를 전담하는 남편 박위용 씨가 고추밭에서 일하는 모습.
사과만큼은 아니라 해도 고추 역시 품이 많이 드는 작물이다. 집 옆 텃밭까지 치면 농사일이 꽤 많기에 이를 전담하는 남편은 하루 대부분을 밭에서 보내곤 한다. 일손이 급할 때는 물론 이정란 씨도 거들지만 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보조’일 뿐이어서 마음이 편하다. 대신 그는 꽃과 식물로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책임지고 있다고.
‘게으른’ 자의 ‘꽉 찬’ 하루
스스로 게으르다고 말은 하지만 그이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빈 구석이 별로 없다. 집을 빙 둘러싼 정원에는 그의 정성 어린 손길에 의해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하다. 높낮이와 색깔을 달리한 꽃들이며, 가늘게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 줄기며, 여기저기 놓인 투박한 도자기들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놓인 게 없어 보인다.
정원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나면 도서관으로 향할 시간이다. <LH함양서하어린이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 지 2년째. 새마을문고 회장을 할 때도 느꼈지만 그는 책과 아이가 있는 환경을 사랑한다.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날마다 어딘가 갈 곳이 있다는 것도 왠지 든든하고 마냥 좋단다.
송계마을 임대주택 단지에 있는 <LH함양서하어린이도서관>. 이정란 씨는 이곳에서 2년째 사서로 일하고 있다.
도서관이 처음 문을 연 작년에는 쌓여 있는 책 정리하고 일일이 바코드 작업하는 게 사서들의 주된 업무였다. 새마을문고에서 오래 활동한 이정란 씨에게는 익숙하고 쉬운 일이었다. 다만 책의 들고남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린이도서관으로 정식 등록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그는 개관한 직후에 함양군에 그 일을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이곳은 비로소 이름만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갖춘 ‘어린이도서관’이 되었다.
그가 이 일을 하는 첫째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행복해서”다. 그러나 개인의 만족을 떠나 “마을에 도서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아이들이 모여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곳,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와 함께 책을 고를 수 있는 곳,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와서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있음으로써 모두의 삶의 질이 높아지지 않겠느냐고.
그러하기에 이정란 씨는 혹여 누군가 “애들 몇 명 온다고 도서관을 하냐”며 툴툴거리면 오히려 이렇게 말해준다. 한 명이 오더라도 도서관은 있어야 한다고. 책 읽는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직접 와서 보면 당신의 생각도 달라질 거라고.
책 읽듯 살아가는 지금이 좋다
책을 읽는 것과 시골에서 사는 것. 이정란 씨에게 이 둘은 참 닮았다. 뭔가에 쫓길 필요 없이 내 속도에 맞출 수 있고, 싫은 것 대신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도시에서는 그러질 못했다. 내 의사나 기분과는 무관하게 언제나 뭔가를, 그것도 빨리빨리 해야만 했다. 가야 할 곳과 만나야 할 사람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착착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까.
서하면 거기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그런 빡빡한 일상에 금이 가고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걸 지켜보는 데서 이정란 씨는 잔잔하고 조용한 행복을 느낀다.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읊조린다. 늦게 일어나도 괜찮은 삶, 억지로 이루기보다 자연스럽게 되어가는 삶, 하루에 네 시간 정도는 책과 아이들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일하는 지금의 삶을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고. 오래 꿈꿔온 것을 이루었으니 이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하루 네 시간 사서로 일하는 틈틈이 정원을 가꾸고 돌본다는 이정란 씨. 느긋하고 게으른, 그러나 꽉 찬 ‘시골의 삶’에서 그는 잔잔한 행복감을 느낀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함양군 서쪽 아래에 자리한 서하면. 사시사철 꽃과 나무와 물이 아름답다고 하여 화림동 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에는 오래도록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 삶의 다른 길을 찾아 걸어들어온 귀농 귀촌인들, 최근 이주해온 젊은 부부와 청년들도 있습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는 이처럼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서하를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서하다움'이란 큰 그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자 합니다.
인터뷰 및 글_자야 jayams@naver.com
사진_김한범 bombbu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