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신기마을 신학범 이장

2022-08-19
조회수 1012

일 줄이고 욕심 내려놔야 삶이 즐거워져



서하면 신기마을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다. 한창 젊을 때 몇 년을 빼고는 마을을 떠난 적 없는 ‘진정한’ 토박이로, 주민들의 신뢰를 얻어 삼십 대부터 여러 차례 이장을 맡아 했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고자 헐떡이며 달려온 세월이 길었던 만큼, 삶에 여유가 생기고부터는 농삿일을 줄이고 아내와 함께 철철이 게이트볼 대회에 참가하며 전국을 유람하는 재미로 살아간다. 67년 인생을 통해 체득한 좌우명이 있다면 농사든 게이트볼이든 이장 일이든 최선을 다하되 “욕심은 내려놔야 한다”는 것. 나이 들수록 몸도 마음도 더 말갛고 투명해져야 한다고 믿는, 신학범 이장은 그런 사람이다.

 

 

“나에게 서하란?

언제까지나 맑고 깨끗하게 보존하고 싶은 곳이지요.”

 

 

산과 물과 논밭이 어우러진 평범한 시골 풍경에 둘러싸인 신기마을. 오른쪽으로 보이는 다리를 건너면 면소재지인 송계마을이다.

  

대한민국 시군 지자체 중에 ‘신기마을’ 없는 곳이 어디 한 군데라도 있을까. 우리말로 ‘새터’인 신기마을은 그만큼 흔한 이름이다. 함양만 봐도 서하뿐 아니라 읍에도 있고 서상에도 있다. 서하면 신기마을은 면소재지인 송계마을 이웃으로, 면사무소며 보건소가 있는 중심가에서 두 발로 십여 분이면 족하다. 산과 들과 집이 어우러진 평범한 모습이지만 마을 어귀 개울가에 둥치 굵은 나무 두 그루가 사이좋게 서 있는 풍광은 꽤 그럴싸하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신학범 씨는 전형적인 토박이 주민으로, 태어나서 지금껏 이곳을 떠나 있던 적이 삼사 년에 불과하다고 한다. 현재 67세니 적어도 60년 이상을 마을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며 나이 들어온 셈. 윗세대가 그러했듯 그이 또한 여기서 결혼을 했고 세 자녀도 여기서 낳아 키웠다. 이장도 꽤 여러 번 맡아 젊은 시절부터 치면 다 합해 이십 년은 되고도 남는다.

 

마을과 함께 나이 들며 ‘이장’만 서너 번째

 

“서른 살에 처음 이장을 했습니다. 젊으니까 마을에서 자꾸만 하라카더라고. 오 년 하다가 억지로 내놓았는데 또 하라 해서 좀 쉬다 몇 년씩 맡곤 했어요. 한동안은 젊은 사람들이 순번을 정해서 했는데 시골이라 점점 사람이 줄잖아요. 또 우리 마을은 다른 데보다 남자가 적습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은 십 년째 하고 있지요.” 


요즘과 달리 과거에는 이장의 일거리가 상당히 많았다고 그는 회고한다. 지금은 한 달에 두 번 열리는 이장회의가 그때는 주 2회였다고. 이는 그만큼 행정기관과 마을의 관계가 긴밀했음을 보여준다. 다른 말로 하면 면에서 마을에 내려보내는 지시사항이 많았고, 이장은 그것을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뿐 아니라 잘 이행되도록 만드는 책무까지 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때는 동네에 사람도 많고 전부 농사를 지었다 안 합니까. 지금은 수확이든 판매든 개인이 자율적으로 하는 게 많지마는 당시만 해도 관에서 농사짓는 걸 일일이 관리하다 보니 이장이 할 게 많았어요. 농자재도 이장이 자기 집에다 다 갖다 놓고 판매를 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가난하니까 농사지어 수확한 다음에 돈을 갚았다고. 이장이 그걸 다 일일이 적어놨다가 장부 맞춰서 농협에 갖다 주는 일을 했단 말입니다. 보리농사 수확 철이면 그거 수매하고 돈 나줘주는 것도 이장이 싹 다 했고.”

 

젊은 시절에 고향 친구들과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신학범 씨다. (사진제공_신학범)

 

지금 같아서는 명함도 못 내밀 논 열댓 마지기에 ‘부자’ 소릴 듣던 시절이었다. 기계가 보급되기 전이라 그 정도 규모면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그런 부잣집조차도 생활이 아주 넉넉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자와 빈자가 큰 차이 없이 다들 어려웠다지만, 신학범 씨는 그중에서도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랐다. 가장인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집안 형편은 더 기울었다. 가난은 쉽게 대물림되는 반면 거기서 벗어날 기회를 얻는 자는 얼마나 드문가. 그이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찍부터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을 짊어져야 했다.

 

“나이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웬만한 건 다 했지. 서하가 지금은 사과와 곶감으로 유명하지만 옛날에는 쌀과 보리가 기본이었어요. 배추와 담배도 많이 했고요. 나도 뭐 그런저런 일을 다 했는데 담배는 독성이 있어서 한 일이 년 하다 말았지요. 또 산 다니면서 나무 베어 숯 구워 나르는 일도 해보고 누에도 쳤습니다. 누에 먹이 주려고 여럿이 산에 가서 뽕잎을 따오곤 했는데, 날이 얼마나 더운지 한 보따리 따오면 속에 깔린 잎은 그 새 변질이 되더란 말이에요. 지금 사람들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얘기 아닙니까? 먹고살 게 없었다고 하면 ‘라면 삶아 먹지 그랬냐’고 되묻는 세상이니.(웃음)”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좀 편해도 괜찮겠지요”

 

스물여덟에 중매로 현재 아내인 이순자 씨를 만나 결혼한 그는 “바람도 쐴 겸 삼사 년 바깥에 나갔”다가 다시 신기마을로 돌아왔고, 그 이후로는 죽 농부로 살았다. 가장으로서 제일 중요하게 여긴 과업이 세 자녀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것이었기에, 몇십 년은 자기 농사에 소작까지 온통 일에만 매달려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편상 공부를 일찍이 포기할 수밖에 없던 게 늘 아쉬웠던 그는 자녀들 교육만큼은 최대한 뒷바라지 해주고 싶었다. 결국엔 셋 다 사년제 대학을 졸업시킴으로써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야 만다. 이쯤 되면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련만 스스로 지난 세월을 되짚어볼 때 부족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니, 부모 마음이란 다 그런 것일까.

 

“경제적인 뒷바라지는 참 열심히 했지만서도 부모로서 자녀와 대화를 많이 한다든지, 때에 맞춰서 이걸 해라 저걸 해라 정리를 해준다든지, 그런 길잡이 역할은 잘하질 못한 거 같애요. 내가 그런 걸 잘했다면 자녀들이 허송세월을 덜 했을 텐데 싶어서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도 뭐 애들이 다 바르게 커서 부모 애는 안 먹이니까. 그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결혼 후 자녀 낳아 키우며 산 세월을 담담히 회고하는 신학범 이장.

 

먹고사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지고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은 자녀들이 대학 졸업해 제 앞가림을 하고부터다. 지금은 셋 다 제 가정을 꾸려 살고 있으니 이제야 비로소 ‘편하게’ 살아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고. 올해 들어 과수원의 사과나무를 감나무로 바꾸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약 십여 년 전에 천 평이 조금 넘는 규모로 시작한 사과 농사는, 그의 말에 따르면 “일이 너무 많아 해가 갈수록 점점 힘에 부친다.” 게다가 사과값은 점점 떨어지는데 노임은 자꾸 비싸지니 그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수입만 치면 사과와 곶감이 비슷하지만 드는 일손을 따졌을 때는 곶감이 낫지요. 곶감은 단기간에 바짝 일하면 되지만 사과는 일 년 내내 일이 엄청 많아요. 약도 열다섯 번 이상은 쳐야 하고 적화나 적과할 때는 일손도 적잖이 필요하고. 그에 비하면 감나무는 키우기가 수월한 편이고, 곶감 만들 때 외부에서 물량을 사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어요. 그래서 올해는 우선 사과나무 일부를 감나무로 바꿨는데 나머지도 삼사 년 안에는 정리가 되지 않겠나, 그렇게 봅니다.” 


게이트볼, 공 하나로 얻는 세 가지 즐거움

 

자녀들 뒷바라지도 끝냈겠다, 이제는 몸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기에 “일을 줄여가는” 중이라는 신학범 이장은, 그렇다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육체와 정신을 같이 써서 뭐라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랄까.

 

그런 점에서 ‘게이트볼’은 그이에게 잘 맞는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노인들이 심심풀이 삼아 하는 가벼운 놀이 정도로 보일 테지만, 그에게 게이트볼은 몸뿐 아니라 머리까지 쓰게 만드는 ‘복합적’인 스포츠게임에 가깝다. 게다가 그것을 매개로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고 교류할 수 있으니, 말하자면 공 하나로 세 가지 즐거움을 얻는 셈이다.

 

“한 이십 년 전에 유림면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기에 초대받아 갔다가 우연히 사람들과 어울려 게이트볼을 치게 됐어요. 그전에도 여기서 어르신들이 하는 걸 보기는 봤지마는 직접 해보니까 느낌이 다르더라고. 그래 어르신들하고 자주 어울려 치고 저녁 내기도 하다가 점차 시합에 나가게 됐어요. 누구한테 지도받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서도 혼자 계속 관찰하고 연습을 했지요. 대회 나가서 일찍 탈락하면 다들 휴게공간에 모여서 놀거든요? 나는 설사 우리 팀이 떨어져도 절대 쉬는 법이 없이 잘하는 팀 하는 거를 눈여겨봤어요. 그러면서 차츰 지식과 실력이 쌓이지 않았겠습니까? 게이트볼은 상대와 맞붙는 경기이기 때문에 좀 잘해야 사람들이 불러줘요. 나는 뭐 여기저기서 자꾸 부르더라고.(웃음)”

 

서하면 게이트볼팀 주장으로서 그는(가운데 앉은 이) 시간이 날 때마다 선수들의 연습을 이끌며 실력 향상을 북돋운다. (사진제공_채홍필)


신학범 이장은 현재 함양군 게이트볼 심판위원회 부위원장이면서 동시에 서하면 게이트볼팀 주장으로서 11명의 선수를 이끌고 있다. 참가팀이 90여 개가 넘는 경상남도 도 대회에서 세 번이나 우승을 거머쥔 만큼, 서하 팀 하면 함양군 내에서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실력으로 알아준다. 그렇다 보니 전국대회나 도 대회처럼 큰 대회만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주최하는 대회에도 초대받아 출전하는 경우가 잦다.

 

“올해만 해도 벌써 인제와 울산에 2박 3일씩 다녀왔고, 얼마 전에는 합천도 갔다 왔어요. 게이트볼은 경기에 따라 남녀 따로 하거나 혼성팀으로 합니다. 두 쌍의 부부가 한 팀을 이루어 나가는 부부대회도 있고요. 아내도 선수라서 우린 늘 같이 다니지요. 특히 요즘은 농사일을 많이 안 하고 집에 가축도 없으니까 오라카는 데는 다 갑니다. 게이트볼 덕분에 우리나라 좋은 데는 다 가본 거 같애요.”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게이트볼 대회에 참가하며 사람들과 교류하고 여행도 한다는 신학범, 이순자 부부. (사진제공_신학범)


살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욕심’이라

 

게이트볼은 대체로 나이 든 사람들이 하고 있고 그 때문에 ‘노인들만’ 하는 종목이라는 편견도 없지 않지만, 대회에 나가 성적을 내고 두각을 나타내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하는 게 낫다”고 그는 조언한다. 그만큼 집중력과 두뇌 회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개인의 실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게이트볼은 팀 경기이기에 팀원 간에 협력과 조화가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게이트볼을 칠 때 필요한 덕목으로 꼽는 것은 바로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다.

 

“성적을 무시할 순 없지만 이기는 것에 너무 욕심을 내면 다툼의 소지가 생겨요. 주장은 요래 하라 하는데 선수는 저렇게 하고 싶다고 우기면 서로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까? 부부간에도 그렇지. 내 남편, 내 아내가 다른 이보다 더 잘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코치를 하지만서도 듣는 사람은 싫어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기에 나가든 그날 하루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기분 좋게 놀다 온다 생각하는 게 좋아요.”

  

욕심을 경계하는 마음은 특히 이장처럼 ‘공공성’을 갖는 일을 할 때 더 단단해진다. 이장은 적으나마 급료를 받기에 엄밀히 따지면 봉사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봉사’의 마음가짐을 지닌 사람이 마을책임자가 되어야 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경험상 알고 있다.

 

욕심이라고 해서 꼭 사적인 이익을 챙기는 것만 뜻하지는 않는다. 이장의 역할과 권한을 과도하게 설정하는 자체가 욕심일 수 있다. 더욱이 요즘처럼 이장 업무가 특별한 게 없고 많지 않은 시기일수록 자신의 자리를 낮추는 태도와 시선이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장이 별거 아니거든요. 위에서 내려오는 지침 잘 전달하고 주민들의 소소한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그 정도지. 그 외에 내가 신경 쓰는 게 있다면 누가 봐도 여기 참 깨끗하다는 말이 나오게끔 마을 관리하는 거, 그거 하납니다. 요즘 쓰레기가 참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인심 좋은 사람이 음료 하나 주면 그걸 먹고 쉽사리 버린단 말이에요. 또 옛날과 다르게 농사도 전부 비닐이고 물건 하나 사도 비닐인데, 그걸 자기 편하자고 아무 데나 버리고 태우니까 이 하천과 공기가 말도 못 하게 오염됐어요. 살면서 제일 안타까운 게 그거지요. 주민들이 각성해서 그 버릇은 꼭 고쳤으면 좋겠어요. 그런다고 서하가 옛날처럼 청정해지지야 않겠지마는 더 망가뜨릴 순 없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말갛고 투명하다.


자연과 후대의 삶이 아닌 당장 나의 편리함만 추구하는 것도 크게 보면 인간의 욕심이다. 그런 점에서 “욕심이 앞서면 뭐든 탈이 나게 마련”이라는 그의 말은 오랫동안 곰곰이 되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 게이트볼을 치든, 농사를 짓든, 아니면 이장을 하든, 무엇이 내 욕심이고 어디까지가 허용 가능한지를 잘 살피기 위해.

 

노년에 가까울수록 더 가볍고 여유롭게

 

신학범 이장은 어제 감자를 캤고, 오늘은 아침 일찍 과수원에 가서 사과에 약을 치고 왔다. 마당 한쪽에는 곧 옮겨 심어야 할 서리태 모종이 빼곡히 자라나는 중이다. 일을 줄인 데다 장마철이어서 쉬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그는, 오후가 되면 늘 아내와 함께 서하면 게이트볼장에 간다. 선수들이 전부 농부인 서하 팀은 요즘처럼 한숨 돌릴 만한 시기가 되어야 같이 모여 연습하는 게 가능하다.

 

“8월 말에 양산에서 대회가 있어요. 그거 준비하려고 요즘은 매일 연습을 합니다. 대회도 자주 나가다 보니 어느 지역엘 가든지 다 아는 사람들이에요. 경기도 경기지만 사람들 만나 대화하는 게 즐거워서 가는 것도 있지요. 우리 나이엔 그게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고단하고 어려운 시절을 건너왔으나 형편상 공부 못한 거 하나 빼면 아무런 회한도 남아 있지 않다. 자녀들 다 키워놓고 나니 욕심도 저절로 비워지고, 욕심이 사라지니 미래에 대한 걱정과 기대도 희미해진다. 그래서일까. 신학범 이장에게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인 지금의 삶이 가뿐하기만 하다. “죽을 때까지” 농사야 짓겠지만, 게이트볼도 계속해서 치겠지만, 어쩌면 내년에도 이장을 맡을지 모르지만, 이 모든 일 역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삶은 이렇게 노년에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수록 더 가볍고 여유롭고 즐거워지고 있다. 

 

신학범 이장 집 마당에는 곧 옮겨 심어야 할 서리태 모종이 빼곡히 자라나는 중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이제 그에게는 농사도 고된 의무가 아닌 가볍고 여유로운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함양군 서쪽 아래에 자리한 서하면. 사시사철 꽃과 나무와 물이 아름답다고 하여 화림동 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에는 오래도록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 삶의 다른 길을 찾아 걸어들어온 귀농 귀촌인들, 최근 이주해온 젊은 부부와 청년들도 있습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는 이처럼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서하를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서하다움'이란 큰 그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자 합니다.


인터뷰 및 글_자야 jayams@naver.com

사진_김한범 bombbug@gmail.com

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