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반정마을 주민 정순자 (서하면 부녀회장)

2022-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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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사는 인생, 뭐라도 열심히 해야제”



 

함양군 지곡면이 고향이다.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동생과 부모를 살뜰히 챙기며 자랐다. 부산에 나가 화장품 회사에 다니던 이십 대 초반에 잠시 잠깐 ‘도시물’을 먹기도 했으나, 집안의 권유로 반정마을 정만수 씨와 결혼하고부터는 줄곧 서하면 주민으로, 지역 농부이자 일꾼으로 살아왔다. 남편의 오랜 투병과 그로 인한 생활고를 혼자 힘으로 극복한 ‘오뚝이’ 같은 인물로도 유명하다. 최근에 겪은 큰 교통사고도 잘 이겨내고 지금은 선물처럼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기쁘게 살고 있다.

 

 

“나에게 서하란?

이제는 삶의 전부가 된 곳.”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찾는다는 사과밭. 정순자 씨는 반정마을에서 사과와 감 농사를 짓고 있다.

 

새벽 다섯 시면 눈이 떠진다. 오래된 습관은 질기디질겨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하루의 시작은 늘 일정하다. 요즘처럼 날이 일찍 밝는 계절엔 일어나자마자 오토바이 타고 밭에 가는 게 일이다. 사과와 감 합해서 약 4천여 평 남짓 되는 땅은, 한 바퀴 휘휘 둘러보는 데만도 품이 꽤 많이 든다. 서너 시간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몸은 땀에 절고 입에서는 단내가 난다.

 

서하면 반정마을에서 사과와 감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정순자 씨는, 단순히 ‘농부’라고만 소개하기에는 떠안은 직책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작게는 반정마을 노인회 총무부터 서하면 부녀회장과 새마을회장에, 3개 면(안의·서하·서상)을 통틀어 구성된 농가주부모임 대표까지 하고 있다. 군 단위 상위기관에서도 수석부위원장이니 총무니 하는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어 읍에도 자주 나가야 한다.

 

“억수로 바쁘긴 해요. 뭐 하나 맡으면 열 일 제쳐놓고 하니까 자꾸 뭐가 들어오더라고. 그래도 나는 아저씨 없이 혼자라서 다른 사람보다야 움직이기가 편하지.”

 

지곡면 ‘맏딸’에서 서하면 ‘새댁’으로

 

1954년생인 정순자 씨의 고향은 함양군 지곡면이다. 2남 5녀 중 맏딸로 태어나 일찍이 ‘살림’을 몸에 익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조막만 한 손으로 “감자 긁고 보리쌀 삶아서” 동생들을 먹인 건 물론이고, 들일 나간 부모 배고플까 밥해서 나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또 아침이면 마을 공동우물에 가서 그날 식구들이 먹을 물을 길었고, 틈틈이 호미 들고 밭도 매러 다녔다.

 

“그땐 다 그렇게 살았어요. 얼마나 밥을 많이 이고 다녔으면 지금 내 키가 초등학교 때 그대로라.(웃음) 친구들이랑 고무줄이나 공기놀이할 때도 꼭 동생 중 누군가는 업고 했어요. 한 번은 물 긷다가 우물에 빠진 적도 있고. 옆집 사는 아가씨 아니었으면 고마 죽을 뻔했지. 쪼깐할 때니까 한 아홉 살쯤 되었을랑가.” 


당시 지곡면에는 지곡국민학교와 대덕국민학교 두 곳이 있었는데 그는 봉곡마을에 있는 대덕국민학교에 다녔다. 집에서 남효리를 거쳐 산길을 돌고 돌아 봉곡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그러나 학교는 그가 ‘맏딸’이 아닌 ‘어린아이’로 돌아가 친구들과 맘껏 어울릴 수 있는 장소였기에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정순자 씨가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도시에 나간 것은 중학교를 마치고 나서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야간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그때부터 결혼 전까지가 그이에게는 인생에 다시 없을 ‘화려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냥 설레는지, 어느덧 육십 대 후반에 접어든 그이의 표정과 눈빛에 윤기가 돌며 반짝이기 시작한다.

 

“결혼 전에 부산에서 화장품 회사를 다녔어요. 광복동에 가면 그 당시에 유명한 아모레, 쥬단학 같은 화장품 회사들이 있었거든. 나는 화장품 판매하는 아줌마들 따라다니면서 고객들 피부 마사지를 해줬지. 팁도 받고 수입이 많았어요. 담요에 밥솥에 텔레비전까지, 그때 좋다는 물건은 전부 사다가 시골집에 갖다 줬다니까.”

 

부산에서 직장생활 하던 당시의 정순자 씨. (사진제공_정순자)

 

이십 대 초반. 그이 말대로라면 도시에서 ‘돈 버는 재미’에 빠져 결혼은 생각지도 않던 때였다. 들어오는 선 자리며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죄 마다했다고 한다. 그랬던 이가 어떤 연유로 고향과 다를 바 하나 없는 시골 마을에 들어가 시부모까지 모시고 사는 새댁이 된 것일까?

 

울면서 모심고 삼 일씩 된장 담그던 날들

 

정순자 씨 부모는 농사를 많이 지었다. 논만 1만4천여 평에 밭도 적잖은 규모였다. 산에 일궈놓은 뽕밭을 관리하면서 누에도 꽤 크게 쳤다니, 일손이 늘 아쉬웠을 만도 하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농사일 잘하는 젊은 남자를 사위로 들이고 싶어 했다. 어느 해 가을, 기계 타작을 도우러 온 반정마을 청년 정말수 씨가 그런 어머니 눈에 띄며 단박에 예비 맏사위 자리를 꿰찼다는데.

 

“그 사람이 일하러 와서는 우리 집에 걸린 내 사진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나 봐요. 우리 집 맏딸이라 하니까 좋아하는 기색을 보였나 보데예. 그래 엄마가 곧바로 중매하는 사람을 앞세워 일을 추진한 거지. 선보라는 얘길 듣고 난 결혼 안 한다 카니까 외할머니가 위중하다고 거짓말까지 해서 부산에 있던 나를 기어이 지곡으로 불러낸 거라.(웃음) 그런데 본가에 가서 남자를 만나보니까 그 전날 내 꿈에 나타난 얼굴과 똑같더라고. 참말로 신기하제. 우리 둘이가 인연이 될라고 그랬던 건지.”

 

그렇게 얼굴을 마주한 세 살 터울의 남녀는 결국 한 달 만에 결혼에 이른다. 어머니의 뜻이 워낙 강고했던 데다 이것도 인연이지 싶어 순순히 따르긴 했으나, 도시에서 직장생활 하던 독립적인 순자 씨에게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결정이었다.

 

남편 정말수 씨와 약혼할 때 찍은 사진. 결혼 후 정순자 씨는 반정마을에 들어가 시부모를 모시며 농사짓고 살았다. (사진제공_정순자)


시댁에 들어가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현실은 훨씬 더 엄혹했다. 9남매 중 다섯째인 남편이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쳐도, 족두리 벗자마자 당장 병상에 누운 시아버지 오줌 수발부터 들어야 하는 상황 앞에선 말문이 막혔다. 그 많은 집안일에 병구완으로도 모자라 2천 평이 넘는 논일까지 직접 해야 할 땐 눈물이 다 났다고.

 

“어릴 적에 밥하고 물 긷고 밭매는 건 했지만서도 논일은 안 해봤거든. 결혼하고 나서 얼마 후에 모를 심는다고 해서 나갔는데, 경험이 없으니까 내가 심은 모들이 다 쓰러지고 넘어가더라고. 그래 막 울면서 배웠어요. 또 콩 농사 끝나고 겨울에 된장을 담그는데 보니까 시동생 시누이들 것까지 다 한다고 메주만 칠십 되야.(웃음) 그 많은 메주를 삶고 디디는 데만 삼 일이 걸렸으니….”


가장 서러웠던 순간은 따로 있다. 첫애 가졌을 때다. 입덧이 심해 물만 마셔도 토하는 날들이 사오 개월씩 이어졌다. 가장 축복받아야 하는 시기에 배곯은 기억은 지금껏 마음 한구석에 그늘로 남아 있지만, 출산은 그 모든 것을 상쇄할 만큼 큰 기쁨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자녀 셋을 차례로 본 10년 동안은 “맘먹은 대로 일이 풀리”면서 땅을 늘려가는 재미와 보람이 쏠쏠했기에, 고된 일상이 더 이상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참말로 윗돌 빼서 아랫돌 고이는 식으로 살았다 안해요”

 

그러던 어느 해엔가 큰일 하나가 생긴다. 담배밭에서 수확하고 남은 찌꺼기를 태우던 게 그만 인근 산으로 번지면서 불이 커지고 만 것이다. 그로 인해 정씨 부부는 많은 돈을 들여 피해보상을 했고, 마을에 물의를 일으켰다는 자책감에 한참을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건 사고도 남편 정말수 씨의 투병에 따른 육체적, 심리적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듯하다. 간 질환에 당뇨까지 있던 남편은 생전에 병원 출입이 잦았다. 증세가 심할 때는 주말마다 진주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당시만 해도 보험 적용이 안 되는 게 많아서 돈이 술술 빠져나가는 게 눈에 보였다. 경제적인 부담 못지않게 보호자인 정순자 씨가 느끼는 심적인 스트레스도 상당하여, 한동안은 자식들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숨조차 편히 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남편의 오랜 투병 생활과 그 과정에서 겪은 시련에 대해 털어놓는 정순자 씨.

 

“한번은 아저씨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서 급하게 거창에 있는 병원엘 갔어요. 의사가 하라는 대로 입원을 시키고 왔는데 새벽에 전화가 온 거야. 위독하다고. 가서 보니까 다 죽게 생겨서 일단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겼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게 꼭 의료사고 같더라고. 그래 내가 사진을 다 찍어놓고 날마다 일지를 썼어요. 책도 이만큼 사다가 병원에서 다 읽고. 마침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 중에 검사가 있어서 그 양반한테 사진이랑 일지랑 다 보내고 소송을 걸었어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들 했지만 그래도 한번은 붙어보고 싶더라고.”


그이가 던진 달걀은 비록 바위를 부수지는 못했을지언정 작은 흠집을 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 대가로 병원으로부터 2천만 원을 받아냈지만, 의료사고로 인한 여섯 번의 대수술 비용에는 어림도 없는 액수였다. 게다가 남편은 그로부터 3년 후, 51세로 명을 다하고 만다.

 

남편을 보내고 나서 정순자 씨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농사지어 빚 갚는 데만 열중하며 살았다. 다행히 사과와 곶감이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다 큰 자녀들이 제 앞가림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부모란 자식에게 늘 퍼주는 존재가 아닌가. 살림이 폈어도 그 옛날 시부모와 살던 낡은 집에서 이날 이때껏 살아온 게 그 생생한 증거라 할 만하다.

 

“빚은 진작에 갚았어도 애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빠듯했지. 참말로 윗돌 빼서 아랫돌 고이는 식으로 살았다 안해요. 그리고 졸업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줄줄이 결혼을 하는 거라.(웃음) 집을 몇 번 새로 할라 했지만서도 돈 좀 모아놓으면 그때마다 꼭 자식한테 돈 들어갈 일이 생기더라고.”

 

지역 일이란 ‘단합’해서 뭔가를 해나가는 것

 

돌아보면 시련이 적지 않았으나 그 와중에도 정순자 씨는 마을과 지역 일을 꾸준히 이어왔다. 젊을 때는 주로 마을 부녀회 일을 했는데, 지금보다 조건이 열악했기에 뭐라도 하려면 동동거리며 애를 쓴 기억뿐이다. 그래도 부녀회 기금 마련을 위해 동네 여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던’ 경험은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절미저축이라고, 밥할 때마다 쌀을 한두 술씩 덜어서 모아요. 온 동네 가구가 몇 달씩 그걸 하면 나중에 양이 꽤 되잖아요. 그걸 팔아서 불우이웃도 돕고 동네에 떡도 돌리고 했어요. 또 옛날에는 여름방학 때면 도시에서 사람들이 무슨 수련회 한다고 시골 학교에 오고 그랬거든. 그러면 부녀들이 나가서 밥도 하고 국수도 삶고 해서 팔았다고. 처음엔 할 일도 많은데 쓸데없는 짓 해서 사람 귀찮게 한다고 욕도 많이 먹었지. 그래도 일단 시작하면 동네 분들이 다 협조를 잘해줬어요. 툴툴거리면서도 이거 하자 하면 다 하더라고.(웃음)”

 

서하면 부녀회 및 새마을회 회장인 그는(가운데) 다양한 봉사활동에 참여하느라 늘 분주하다. (사진제공_정순자)

 

어떤 성과를 내고 거기서 만족감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는 “단합해서 뭔가를 하는” 그 자체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부녀회에서 시작한 지역 일은 새마을회로, 농가주부모임(농주모)으로 확대되었고, 활동 단위도 마을에서 면과 군으로 점차 넓어졌다. 그만큼 가야 할 곳이며 해야 할 것이 늘어났지만, 정순자 씨는 이런 분주함을 오히려 즐기는 눈치다.

 

“올해 새마을회에서 읍내 땅 사천 평을 구해 고구마를 심어놨거든. 내일은 거기 가서 종일 풀 작업을 해야 해요. 사람들 일하는데 그냥 갈 수 있나? 떡이라도 좀 맞춰서 가야지. 또 며칠 후에 서하초 체육관에서 귀농귀촌인화합한마당이라고 행사가 하나 열리는데, 좀 이따 그거 준비하는 회의가 있어서 가봐야 해.”

 

밥과 찬을 준비해 혼자 거동하기 힘든 고령층에게 배달하는 일이나 집집이 어르신들을 찾아가 염색해주는 일도 그이가 속한 단체에서 오랫동안 해온 사업이다. 이런 건 잇속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야말로 자기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하는 봉사에 가깝지만 하고 나면 마음이 더 뿌듯하다.


“작년에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병원에 삼 개월 정도 있었거든. 운전하고 오는데 갑자기 짐승이 나타나서 그거 피할라다가 그대로 나무를 받아버렸어요. 장이 파열돼서 많이 잘라냈지. 척추랑 가슴뼈도 다 나가서 수술도 여러 번 했고. 그 정도로 다치면 죽는다고 사람들이 죄다 그랬어요. 그런데 이렇게 잘 회복돼서 살고 있으니 암만 생각해도 기적 같애. 그래 내가 속으로 그랬어요. 하나님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셨으니 남은 세월은 즐거이 봉사나 다니다가 당신이 부르면 가겠다고.”

 

‘살 문’을 통과하고 다시 선 삶의 무대에서

 

죽을 문이 하나면 살 문은 아홉이라더니 사연 많은 정순자 씨에게 삶은 살아갈 문을 끊임없이 열어주었다. 불과 몇 개월 전, 남들이 죽을 거라 예상했던 고비마저 가뿐히 넘기고 또다시 ‘살’ 문 하나를 통과한 그에게 남은 생은 덤이고 선물일 뿐. 그러하기에 이제부터는 작은 것에 연연하기보다 좀 더 멀리, 넓게 보면서 살고자 한다.

 

“지역에 제일로 바라는 건 주민들이 너 나 없이 서로 잘 어울려 사는 거지. 그러자면 있던 사람들이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먼저 품어야 안 되겠어요? 그런 거 없이 색안경부터 끼고 보면 그 사람들이 여기 정붙이고 살기가 어렵다고. 그리고 언제든지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우선시하면 문제가 안 생겨요. 당장은 내가 손해 보는 거 같아도 공동체에 이익이 되면 그게 결국엔 나한테까지 돌아오는데, 사람들이 그걸 잘 모르는 거 같더라고.”

 

반정마을 마을회관 앞에 서 있는 보호수. 큰 나무의 품 안에서 뭇 생명이 함께 살아가듯, 서하면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주민들이 서로 아끼며 상생하기를 정순자 씨는 바라고 있다.

  

이제야 밝히는 거지만 어린 순자의 꿈은 가수였다. 어느 동네에 가설극장이 선다는 소문이 들리면 소녀는 바람처럼 부픈 마음을 안고 부모 몰래 천막에 숨어들어서라도 쇼를 구경했다. 그만큼 무대가 좋았고, 그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이 멋져 보였다.

 

그건 다 “옛날얘기”고 지금은 농사와 지역 일에 바빠 사소한 취미마저 전부 “포기하고” 살아간다지만, 어쩌면 현재의 정순자 씨야말로 이 서하면을 무대 삼아 인생을 노래하는 ‘진짜’ 가수가 아닐까. 그가 들려주는 노래엔 반주나 곡조가 따로 없다. 그러나 삶의 애환과 지혜가 담긴 가사만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하늘이 허락한 남은 생애 동안, 그가 좀 더 목청 높여 자유롭게 노래하기를 바라게 되는 이유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함양군 서쪽 아래에 자리한 서하면. 사시사철 꽃과 나무와 물이 아름답다고 하여 화림동 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에는 오래도록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 삶의 다른 길을 찾아 걸어들어온 귀농 귀촌인들, 최근 이주해온 젊은 부부와 청년들도 있습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는 이처럼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서하를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서하다움'이란 큰 그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자 합니다.


인터뷰 및 글_자야 jayams@naver.com

사진_김한범 bombbu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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