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고 반성하며 ‘잘’ 익어갑니다
1944년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아버지 품에 안겨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년에 어머니와 헤어지고 여동생을 병으로 잃는 등 시련이 잇따랐으나, 서하면 송계마을에 지역 유지로 자리잡은 아버지 덕분에 생활고를 모르고 자랐다. 고등학교 이후 삶의 터전으로 삼은 곳은 포항이다. 운수업과 건설업 등에 종사하다가 뒤늦게 찾아온 위기에 송계마을로 돌아온 이후에는 이장을 비롯해 여러 기관의 일을 맡아 했다. 팔순이 코앞이나 체력과 정신력만큼은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다고 자부하는 이영일 어르신의 ‘팔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에게 서하란?
현재보다는 과거의 추억과 그리움으로 사는 곳.”
첫인상에서 젊은 시절의 모습이 연상되는 사람이 있다. 이영일 어르신이 그러하다. ‘법적 노인’이 된 지 한참 지났음에도 ‘왕년’에 운동깨나 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니나 다를까 태권도 유단자에 해병대 출신이란다. ‘액션’ 배우를 꿈꾸던 그 시절엔 몸이 단단하면서도 날렵하기 이를 데 없었다. 펄펄 날아다니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종종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다 옛날 일이지. 운동 그만두고 나서는 살도 많이 찌고 몸이 형편없어졌어요. 지금은 건강 관리차 슬슬 걷기나 하고 읍에 나갈 때 대중교통 이용하고 뭐 그 정도로 합니다.”
몸이 망가졌다고 말은 하지만 어르신은 여전히 체력이나 정신력에 자신감을 보인다. 흔히들 말하듯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얘기. 하지만 벼가 익으면서 고개를 숙이듯 사람도 나이 들어감에 따라 무르익어야 한다고, 그게 안 되면 인생 헛산 것 아니겠냐고 또한 반문한다. 이런 말들의 행간을 들여다보기 위해 팔십 년 가까이 이어져 온 삶의 궤적을 한 걸음씩 따라가본다.
이별과 상실로 얼룩진 유년의 기억
이영일 어르신은 음력으로 1944년 말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바다 건너 섬나라로 간 아버지(이용수)와 일본인 어머니(최범람) 사이에서 태어난 첫아들이다. 안경 제조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는 해방 직후 가족을 이끌고 고국에 돌아와 꽤 오래 경찰공무원을 했다. 귀국 초기에 합천에 정착했다가 수동과 안의 등 서부경남권을 전전한 것은 아버지 직장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팔십 대 이상 어르신들이 하나같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 꼽는 육이오 전쟁은 합천에서 겪었다. 경찰 가족이라 피난이 절실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아버지의 귀가가 늦어 깜깜한 어둠 속에 집을 나섰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의 사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이영일 어르신.
“합천군 삼가면 금리에 살고 있을 때 전쟁이 터졌어요. 집에 포탄 하나가 꽂혀서 건물 한 채가 타고 그랬다고. 피난 가는 날 아버지가 밤늦게 오더니 구들장을 들어 그 안에 경찰복이랑 총은 숨겨놓고 신분증 하나만 챙깁디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랑 나랑 여동생을 데리고 피난길에 오른 거지.”
짐이라고는 쌀과 반찬 조금에 밥그릇이며 수저가 전부였지만, 산 넘고 물 건너 마산 이모할머니 댁까지 가는 길은 고되었다. 낮에는 걷고 밤이 되면 인근 민가의 신세를 졌는데 아버지는 직업상 위험인물이어서 하천가나 다리 밑 같은 으슥한 데 내려가 혼자 잠을 청했다 한다.
“돌아보면 참 놀라운 게, 피난길에 강도를 만날 수도 있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전혀 그런 게 없었어, 그때는. 오히려 우리가 저녁 무렵 거물거물할 때 걷고 있으면 아지매들이 나와서 막 손짓을 하며 먹고 가소, 자고 가소, 이랬다고.”
정작 ‘큰일’을 치른 건 친척 집에서의 더부살이를 끝내고 합천 집에 돌아와서다. 의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서 설사병에만 걸려도 죽어 나가던 시기에 하필이면 동생이 그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침에 깨워도 아무 기척이 없는 동생이 이상하여 오빠 영일은 큰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다는데.
“아버지와 엄마는 전쟁 전에 이미 헤어진 상태였어요. 아버지는 일 다니고 할머니가 나랑 동생을 보살피던 중에 그 사달이 난 거지. 그때의 아픔은 말도 못 합니다. 지금도 눈에 생생해요. 할머니가 밥 먹으라고 영순이를 깨우라 카는데 이놈의 가시나가 막 흔들어도 움직이질 않는 거라. 내가 할머니를 부르니까 와 보시더니 아가 죽었다고 대성통곡을 하시더라고.”
송계마을은 아버지 터전, 나는 그 수혜자
아버지의 재혼으로 불어난 가족은, 맏아들 영일이 5학년 되던 해에 서하면 송계마을로 들어온다. 아버지가 업무 수행 중 총에 맞으면서 경찰을 그만두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 후 아버지는 농협조합장을 여러 번 하는 등 지역 유지로서 자리를 굳혔고, 덕분에 가족은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송계국민학교(현재 서하초) 졸업 사진. 넷째 줄 맨 왼쪽이 13세 소년 이영일이다.
“잘 사는 편이었지요. 그래도 뭐 어릴 때는 다 똑같이 장난치고 놀잖아요. 나도 솔직히 공부엔 별로 흥미가 없었고 엄청 개구쟁이였다고. 친구들이랑 남의 감자밭 밀밭에 몰래 들어가 서리해다가 불에 그슬려서 먹고 그랬어요. 서로 얼굴에 검댕 묻혀가면서 낄낄거리고. 또 그때는 여 앞에 큰물이 있어서 여름에는 다이빙하고 겨울에는 썰매 타고 그리 놀았지.”
서하초와 서상중을 다닌 이영일은 안의고를 졸업하고 나서 곧장 함양을 벗어나 포항으로 건너간다. 본인이 도시 생활을 원하기도 했지만 “여기 있어봤자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 담배밖에 더 배우겠냐”며 떠날 것을 종용하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지역이 하필 포항이었던 이유는 당시 고모가 거기서 크게 국수 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때부터 꾸준히 태권도를 배워 이미 유단자였던 그는, 포항에서 운동을 계속하며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을 방과 후에 불러모아 공장 마당에서 지도했다. 액션 배우를 한창 꿈꿨던 것도 그 시절의 일이다.
“택1)도 없는 생각이었지.(웃음) 그런데 참 그때는 그게 그리 좋아 보이더라고. 박노식 씨 나오는 그런 영화 있잖아요.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서 영화배우는 못 해봤어요. 사람들 내려오면 쫓아다니고 같이 어울리고 하면서 흉내만 좀 내다 끝나버렸지.”
1) 턱의 방언. ‘턱없다’는 근거가 없거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의미한다.
피 끓고 기운이 성했던 청년 이영일은 몇 년 후 해병대에 자원한 데 이어 월남전에도 다녀온다. 그 몇 년이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모질고 거친” 시기였지만 그것을 감내했기에 정신적으로 더 강해질 수 있었다고, 어르신은 지금도 강조한다.
아내 김설자 씨와 연애할 때 찍은 사진. 태권도를 오래한 젊은 날의 그는 몸이 호리호리하고 날렵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에는 포항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딸’ 김설자 씨와 결혼해 딸 아들 낳고 평범한 가장 노릇을 하며 살았다. 운수업을 하다 그만두고 건설업에 뛰어들었을 때까지는 그런대로 호시절도 누렸다. 시련은 뒤늦은 오십 대에 찾아온다. 건설업을 하다 만난 지인의 제안으로 뛰어든 호텔 사업이 부도를 맞으면서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 것.
“송계는 부도 맞고 갈 데 없어 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내 상태가 좋았을 리 없잖아요? 아내는 여기 오는 걸 반대해서 처음엔 나 혼자 들어왔어요. 딸 아들은 이미 직장 다닐 때고.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나를 딱 보니까 완전히 맛이 간 거야. 내가 사업 망하고부터 사람기피증이 생겨서 아침에 소주를 반병이라도 마셔야 그 기운으로 하루를 시작했거든요. 그래 안 되겠으니까 며느리를 부른 거지. 니가 와서 남편 좀 다시 일으켜 세우라고. 그래서 아내가 들어오고 같이 버섯농장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뒤늦게 들어와 ‘지역 사람’이 되기까지
송계마을은, 비록 고향은 아니나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던 청소년기의 추억이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아버지가 생전에 몇십 년간 공들여 닦아놓은 터전이기도 하다. “망하고 나서” 돌아왔다는 게 본인으로서는 자존심 상하고 민망할 수는 있을지언정, 나이 오십이 훌쩍 넘어 다시 시작하기에 이곳처럼 좋은 곳은 없었다.
포항에서 막 넘어온 당시, 아내 표현대로라면 “패잔병” 같던 그는 여기서 버섯 농사로 경제적인 재기를 도모하는 한편 지역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십 년 이상 마을 이장을 도맡은 건 물론이고 서하면 체육회에 서하초운영위원장에 발전협의회 회장까지 웬만한 직은 한 번씩 다 거쳤다.
뒤늦게 위기를 맞고 돌아온 송계마을에서 그는 경제적인 재기를 도모하는 한편 지역에 섞이며 여러 일을 맡아 해왔다.
“여기 들어왔을 때가 1998년인가 99년인데 그때만 해도 가구 수가 백팔 호 정도 됐어요. 나 들어오고 돌아가신 분이 백 명은 넘을 겁니다. 그 많던 이들이 전부 농사를 지었으니 당시에는 이장 일이 말도 못 하게 많았지. 지금 농협이 하는 일을 몽땅 이장들이 했으니까. 쌀 수매하는 날이면 집사람이 돼지고기 넣고 김치찌개 끓여서 수매장까지 가져와 사람들 먹이고 그랬어요.”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고부터는 마을 노인회며 서하면 분회 일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6년째 서하면 노인회장이면서 군 부회장도 겸하고 있다. 노인회라는 조직이 아무래도 노인복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보니 이 회장은 군의 관련 정책에 대해 무조건 찬성하기보다 쓴소리도 곧잘 하는 편이다. 일례로 어르신들에게 허드렛일을 시키고 돈을 주는 노인일자리가 과연 다수 노인을 위한 보편적 정책인지, 또 그에 대한 지자체의 관리 감독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묻고 싶다고.
“노인일자리도 그렇고 선심성 복지가 많다고 봅니다. 그런데 다수 노인에게는 그런 정책이 잘 와닿지 않아요. 마을회관 부식비 지원도 얼마 안 돼서 노인네들이 일 년에 얼마씩 걷어서 먹는 데가 많다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선은 공무원이 노인들을 직접 만나서 뭐가 필요한지 들어야 해. 면사무소나 무슨 기관 가면 가만히 앉아 있거나 밖에 나가 담배 태우는 공무원들 많잖아요.(웃음) 그런 사람들 활용해서 현장의 소리부터 들어야지.”
“익은 척은 하고 살자,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이번에는 같은 연배의 노인들에게로 화살이 향한다. 나이 든 세대가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 존중받으려면 먼저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건 쏙 빼놓고 과거의 경험과 자랑만 내세워 큰소리치는 이가 너무 많다는 것. 이 회장이 볼 때 그건 “어른으로서 갖출 건 안 갖추고 대우만 받으려는” 속셈에 불과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전체 노인의 품격을 떨어뜨릴 뿐이다.
“벼가 자라면 익어서 고개를 숙이잖아요. 사람도 나이를 먹을수록 익어야 하는데 그게 어렵단 말입니다. 맨 자랑이나 하고 젊은 사람들한테 호통이나 치면서 살아요. 그런다고 사람들이 말을 듣습니까? 지는 안 그러면서, 하고 욕이나 하지.(웃음) 노인으로 존경받고 대접받으려면 먼저 반성을 해야 해요. 잘못한 걸 뉘우치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줘야 한다고. 나도 뭐 익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익은 척은 하고 살려고 하지요.”
서하면 노인회 활동 사진. (맨 뒷줄 정가운데가 이영일 회장)
젊을 때는 성격이 불처럼 뜨겁고 매서웠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단번에 인연을 끊어버리는 그에게 사람들은 ‘면도칼’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런 성격을 비로소 ‘알아차리고’ 바로잡으려 노력하기 시작한 건 ‘인생 선배’를 만나면서다. 정형외과 의사인 그 선배는 포항에서 날마다 아침에 하던 운동 모임의 같은 멤버였다.
“하루는 그분이 나한테 와서 아우님, 하고 부르더라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늘부터 잠자리에 들 때 하루에 있었던 일을 비디오 틀 듯이 해보라는 거야. 내가 한 모든 말과 행동들을 필름 돌리듯이 해서 다시 보라는 거지. 그래 내가 진짜로 해봤거든요? 아이고, 정말로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게 많더라고. 그때부터 내가 성격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인간이니까 잘 안 고쳐지지만 그래도 자꾸 하니까 조금씩 나아지데요.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나에겐 정말 고마운 분이지요.”
불처럼 주변을 태우고 면도날처럼 마음을 베던 한창때의 이영일은 선배의 조언을 새겨들으며 다행히 삶을 관통하는 인과응보의 진실을 깨우쳤다. 그리고 한 차례 큰 시련을 겪은 후 송계마을에 들어와 이웃과 벗하며 살면서, 더 많이 누그러지고 둥그레졌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여전히 부끄러움과 후회로 낯이 붉어지지만, 이 회장은 그것이 ‘익은 척’이라도 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어준다는 것을 알기에 날마다 더 자주 돌아보고 더 많이 반성하려 한다.
서로 마음 열고 섞이면서 사는 게 최선
그러면 마을 어른으로서 젊은 세대와 새로 이주해온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없을까. 이영일 회장은 이 질문에 “다들 넉넉하진 않아도 오순도순 정스럽던” 서하의 옛 정취가 그립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마을의 공동체 정서가 점점 희미해지는 게 안타깝다고. 이를 되살리려면 살던 이들이나 들어온 이들이나 자기 목소리를 내기보다 상대의 목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는 태도를 갖춰야 하지 않겠냐고.
“요즘은 형편이 풍족해져서 그런지 다들 목소리가 너무 커졌어.(웃음) 우선 우리 노인들부터 솔선수범해야 하겠지만, 새로 들어오는 젊은 분들도 마음에 좀 안 드는 게 있더라도 ‘촌사람들 참 별나게 구네’ 하고 돌아서기보다 상대의 처지를 먼저 헤아려보면 좋겠어요. 또 누구랄 것 없이 인사를 잘하는 게 참 중요해. 나는 임대단지에 사는 젊은 새댁들 만나면 먼저 인사합니다. 나이가 적든 많든 괜히 눈에 힘이나 주고 그러면 보기 싫잖아요. 서로 마음을 열고 섞이면서 살아야지.”
송계마을에서 이웃과 벗하고 살며 성격이 많이 누그러지고 둥그레졌다는 이영일 어르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만이 잘 늙어가는 비결임을 강조한다.
세월에 풍경이 바뀌어 가듯 옛사람은 가고 새사람이 온다. 정취와 분위기라는 것도 변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이영일 회장은 정자 좋고 물 좋고 ‘인심까지’ 좋던 서하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인심은 말 그대로 사람의 마음이니 각자 노력하면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아직은 떨쳐버리기가 힘들다.
지금 당장은 고루해 보일지언정 마을에 이런 어른이 있다는 게 언젠가는 귀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시골에 젊은이가 드문 만큼 이제는 건강하게 움직이고 생각하는 노인 세대 또한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니 말이다. 게다가 우리 모두의 가슴 한구석엔 욕쟁이 할머니와 무뚝뚝한 할아버지의 ‘다정한’ 잔소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그 마음을 발견하는 것부터가 어쩌면 다시 공동체로 나아가는 첫걸음인지도 모를 일이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함양군 서쪽 아래에 자리한 서하면. 사시사철 꽃과 나무와 물이 아름답다고 하여 화림동 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에는 오래도록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 삶의 다른 길을 찾아 걸어들어온 귀농 귀촌인들, 최근 이주해온 젊은 부부와 청년들도 있습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는 이처럼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서하를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서하다움'이란 큰 그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자 합니다.
인터뷰 및 글_자야 jayams@naver.com
사진_김한범 bombbug@gmail.com
돌아보고 반성하며 ‘잘’ 익어갑니다
1944년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아버지 품에 안겨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년에 어머니와 헤어지고 여동생을 병으로 잃는 등 시련이 잇따랐으나, 서하면 송계마을에 지역 유지로 자리잡은 아버지 덕분에 생활고를 모르고 자랐다. 고등학교 이후 삶의 터전으로 삼은 곳은 포항이다. 운수업과 건설업 등에 종사하다가 뒤늦게 찾아온 위기에 송계마을로 돌아온 이후에는 이장을 비롯해 여러 기관의 일을 맡아 했다. 팔순이 코앞이나 체력과 정신력만큼은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다고 자부하는 이영일 어르신의 ‘팔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에게 서하란?
현재보다는 과거의 추억과 그리움으로 사는 곳.”
첫인상에서 젊은 시절의 모습이 연상되는 사람이 있다. 이영일 어르신이 그러하다. ‘법적 노인’이 된 지 한참 지났음에도 ‘왕년’에 운동깨나 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아니나 다를까 태권도 유단자에 해병대 출신이란다. ‘액션’ 배우를 꿈꾸던 그 시절엔 몸이 단단하면서도 날렵하기 이를 데 없었다. 펄펄 날아다니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종종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몸이 망가졌다고 말은 하지만 어르신은 여전히 체력이나 정신력에 자신감을 보인다. 흔히들 말하듯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얘기. 하지만 벼가 익으면서 고개를 숙이듯 사람도 나이 들어감에 따라 무르익어야 한다고, 그게 안 되면 인생 헛산 것 아니겠냐고 또한 반문한다. 이런 말들의 행간을 들여다보기 위해 팔십 년 가까이 이어져 온 삶의 궤적을 한 걸음씩 따라가본다.
이별과 상실로 얼룩진 유년의 기억
이영일 어르신은 음력으로 1944년 말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바다 건너 섬나라로 간 아버지(이용수)와 일본인 어머니(최범람) 사이에서 태어난 첫아들이다. 안경 제조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는 해방 직후 가족을 이끌고 고국에 돌아와 꽤 오래 경찰공무원을 했다. 귀국 초기에 합천에 정착했다가 수동과 안의 등 서부경남권을 전전한 것은 아버지 직장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팔십 대 이상 어르신들이 하나같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로 꼽는 육이오 전쟁은 합천에서 겪었다. 경찰 가족이라 피난이 절실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아버지의 귀가가 늦어 깜깜한 어둠 속에 집을 나섰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 시절의 사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이영일 어르신.
짐이라고는 쌀과 반찬 조금에 밥그릇이며 수저가 전부였지만, 산 넘고 물 건너 마산 이모할머니 댁까지 가는 길은 고되었다. 낮에는 걷고 밤이 되면 인근 민가의 신세를 졌는데 아버지는 직업상 위험인물이어서 하천가나 다리 밑 같은 으슥한 데 내려가 혼자 잠을 청했다 한다.
정작 ‘큰일’을 치른 건 친척 집에서의 더부살이를 끝내고 합천 집에 돌아와서다. 의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서 설사병에만 걸려도 죽어 나가던 시기에 하필이면 동생이 그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침에 깨워도 아무 기척이 없는 동생이 이상하여 오빠 영일은 큰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다는데.
송계마을은 아버지 터전, 나는 그 수혜자
아버지의 재혼으로 불어난 가족은, 맏아들 영일이 5학년 되던 해에 서하면 송계마을로 들어온다. 아버지가 업무 수행 중 총에 맞으면서 경찰을 그만두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 후 아버지는 농협조합장을 여러 번 하는 등 지역 유지로서 자리를 굳혔고, 덕분에 가족은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송계국민학교(현재 서하초) 졸업 사진. 넷째 줄 맨 왼쪽이 13세 소년 이영일이다.
서하초와 서상중을 다닌 이영일은 안의고를 졸업하고 나서 곧장 함양을 벗어나 포항으로 건너간다. 본인이 도시 생활을 원하기도 했지만 “여기 있어봤자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 담배밖에 더 배우겠냐”며 떠날 것을 종용하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지역이 하필 포항이었던 이유는 당시 고모가 거기서 크게 국수 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때부터 꾸준히 태권도를 배워 이미 유단자였던 그는, 포항에서 운동을 계속하며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을 방과 후에 불러모아 공장 마당에서 지도했다. 액션 배우를 한창 꿈꿨던 것도 그 시절의 일이다.
1) 턱의 방언. ‘턱없다’는 근거가 없거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의미한다.
피 끓고 기운이 성했던 청년 이영일은 몇 년 후 해병대에 자원한 데 이어 월남전에도 다녀온다. 그 몇 년이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모질고 거친” 시기였지만 그것을 감내했기에 정신적으로 더 강해질 수 있었다고, 어르신은 지금도 강조한다.
아내 김설자 씨와 연애할 때 찍은 사진. 태권도를 오래한 젊은 날의 그는 몸이 호리호리하고 날렵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에는 포항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딸’ 김설자 씨와 결혼해 딸 아들 낳고 평범한 가장 노릇을 하며 살았다. 운수업을 하다 그만두고 건설업에 뛰어들었을 때까지는 그런대로 호시절도 누렸다. 시련은 뒤늦은 오십 대에 찾아온다. 건설업을 하다 만난 지인의 제안으로 뛰어든 호텔 사업이 부도를 맞으면서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 것.
뒤늦게 들어와 ‘지역 사람’이 되기까지
송계마을은, 비록 고향은 아니나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던 청소년기의 추억이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아버지가 생전에 몇십 년간 공들여 닦아놓은 터전이기도 하다. “망하고 나서” 돌아왔다는 게 본인으로서는 자존심 상하고 민망할 수는 있을지언정, 나이 오십이 훌쩍 넘어 다시 시작하기에 이곳처럼 좋은 곳은 없었다.
포항에서 막 넘어온 당시, 아내 표현대로라면 “패잔병” 같던 그는 여기서 버섯 농사로 경제적인 재기를 도모하는 한편 지역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십 년 이상 마을 이장을 도맡은 건 물론이고 서하면 체육회에 서하초운영위원장에 발전협의회 회장까지 웬만한 직은 한 번씩 다 거쳤다.
뒤늦게 위기를 맞고 돌아온 송계마을에서 그는 경제적인 재기를 도모하는 한편 지역에 섞이며 여러 일을 맡아 해왔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고부터는 마을 노인회며 서하면 분회 일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6년째 서하면 노인회장이면서 군 부회장도 겸하고 있다. 노인회라는 조직이 아무래도 노인복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보니 이 회장은 군의 관련 정책에 대해 무조건 찬성하기보다 쓴소리도 곧잘 하는 편이다. 일례로 어르신들에게 허드렛일을 시키고 돈을 주는 노인일자리가 과연 다수 노인을 위한 보편적 정책인지, 또 그에 대한 지자체의 관리 감독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묻고 싶다고.
“익은 척은 하고 살자,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이번에는 같은 연배의 노인들에게로 화살이 향한다. 나이 든 세대가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 존중받으려면 먼저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건 쏙 빼놓고 과거의 경험과 자랑만 내세워 큰소리치는 이가 너무 많다는 것. 이 회장이 볼 때 그건 “어른으로서 갖출 건 안 갖추고 대우만 받으려는” 속셈에 불과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전체 노인의 품격을 떨어뜨릴 뿐이다.
서하면 노인회 활동 사진. (맨 뒷줄 정가운데가 이영일 회장)
젊을 때는 성격이 불처럼 뜨겁고 매서웠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단번에 인연을 끊어버리는 그에게 사람들은 ‘면도칼’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런 성격을 비로소 ‘알아차리고’ 바로잡으려 노력하기 시작한 건 ‘인생 선배’를 만나면서다. 정형외과 의사인 그 선배는 포항에서 날마다 아침에 하던 운동 모임의 같은 멤버였다.
불처럼 주변을 태우고 면도날처럼 마음을 베던 한창때의 이영일은 선배의 조언을 새겨들으며 다행히 삶을 관통하는 인과응보의 진실을 깨우쳤다. 그리고 한 차례 큰 시련을 겪은 후 송계마을에 들어와 이웃과 벗하며 살면서, 더 많이 누그러지고 둥그레졌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여전히 부끄러움과 후회로 낯이 붉어지지만, 이 회장은 그것이 ‘익은 척’이라도 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어준다는 것을 알기에 날마다 더 자주 돌아보고 더 많이 반성하려 한다.
서로 마음 열고 섞이면서 사는 게 최선
그러면 마을 어른으로서 젊은 세대와 새로 이주해온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없을까. 이영일 회장은 이 질문에 “다들 넉넉하진 않아도 오순도순 정스럽던” 서하의 옛 정취가 그립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마을의 공동체 정서가 점점 희미해지는 게 안타깝다고. 이를 되살리려면 살던 이들이나 들어온 이들이나 자기 목소리를 내기보다 상대의 목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는 태도를 갖춰야 하지 않겠냐고.
송계마을에서 이웃과 벗하고 살며 성격이 많이 누그러지고 둥그레졌다는 이영일 어르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만이 잘 늙어가는 비결임을 강조한다.
세월에 풍경이 바뀌어 가듯 옛사람은 가고 새사람이 온다. 정취와 분위기라는 것도 변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이영일 회장은 정자 좋고 물 좋고 ‘인심까지’ 좋던 서하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인심은 말 그대로 사람의 마음이니 각자 노력하면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아직은 떨쳐버리기가 힘들다.
지금 당장은 고루해 보일지언정 마을에 이런 어른이 있다는 게 언젠가는 귀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시골에 젊은이가 드문 만큼 이제는 건강하게 움직이고 생각하는 노인 세대 또한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니 말이다. 게다가 우리 모두의 가슴 한구석엔 욕쟁이 할머니와 무뚝뚝한 할아버지의 ‘다정한’ 잔소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그 마음을 발견하는 것부터가 어쩌면 다시 공동체로 나아가는 첫걸음인지도 모를 일이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함양군 서쪽 아래에 자리한 서하면. 사시사철 꽃과 나무와 물이 아름답다고 하여 화림동 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에는 오래도록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 삶의 다른 길을 찾아 걸어들어온 귀농 귀촌인들, 최근 이주해온 젊은 부부와 청년들도 있습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는 이처럼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서하를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서하다움'이란 큰 그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자 합니다.
인터뷰 및 글_자야 jayams@naver.com
사진_김한범 bombbu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