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월평마을 사과 농부 조경제

202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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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산다


 

 

서하면 월평마을 어느 집안의 늦둥이 ‘막냉이’로 태어났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인지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한다. 고교 졸업 후 잠깐 서울 생활을 경험했고, 한창 일할 나이에는 덤프트럭 몰고 공사 현장을 떠돌며 살았다. 그러다 본인이 ‘고향 체질’임을 깨닫고 귀향한 지 올해로 십삼 년째. 현재는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사과 농사짓는 틈틈이 지역 일을 도우며 살아간다. 이따금 낚시를 즐기며, 직접 잡은 민물고기로 어탕 끓여 손님들 대접하는 것이 주특기다.


 

“나에게 서하란?

사람들과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곳이죠.”

 

 

월평마을에 사는 농부 조경제 씨의 사과 과수원.

 

조경제 씨는 낚시를 좋아한다. 외지를 떠돌며 살 땐 바다낚시를 많이 다녔다. 고향인 월평마을에 돌아오고 나서는 서하면 구석구석을 휘감아 도는 계곡을 찾는다. 돌아보면 어릴 때도 형들과 어망 들고 물에서 노는 게 최고였다. 어쩌면 그때 그 향수 어린 마음이 그를 계속해서 물가로 이끄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 먼저 보내고 홀로 늙어가는 어머니와 살면서 자연스럽게 요리에 입문한 그는, 잡은 민물고기로 종종 어탕을 끓인다. 먼저 물고기는 뼈를 추려낸 다음 살만 곱게 갈아 체에 거른다. 단배추는 한 번 데쳐 물기를 꼭 짜내어 준비하는데, 그래야 ‘색소’가 빠져 풀냄새가 안 난다. 이 둘을 같이 푹푹 끓이다 적당히 간을 하고 마늘과 제피가루1)를 넣으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어탕이 완성된다.


1) 조핏가루의 방언. 산초나무 열매에서 씨를 빼고 빻은 가루를 말한다.


 

“어머니도 좋아하시고, 또 고향 친구들 오면 많이 해주죠. 외지에 나가 사는 애들인데 내가 여기 있으니까 자주 옵니다. 오면 뭐하겠어요. 제 과수원 창고에 모여 같이 먹고 노는 게 일이지. 하도 오니까 귀찮긴 한데 오지 말랄 수도 없고.(웃음)”

 

무뚝뚝함 이면에 감춰진 ‘막냉이’의 살뜰함

 

조경제 씨의 과수원 창고. 전망이 좋고 한적하여 친구들과 모여 노는 ‘아지트’로 그만이다.

 

월평마을 건너편 언덕길에 자리한 그의 창고는, 아닌 게 아니라 몇몇이 둘러앉아 먹고 놀기에 좋은 아지트로 손색없어 보인다. 서하면을 빙 둘러싼 산이 한눈에 조망되고, 불어오는 바람이 한여름에도 서늘하다. 창고 주변 과수원에서는 흰 꽃이 흩날리거나 달콤한 사과 향이 퍼져가는 등 계절별로 운치를 북돋운다. 


그렇다 해도 주인장이 사람을 반기는 성격이 아니라면 찾는 이가 적을 텐데, 조경제 씨는 외모에서 풍기는 무뚝뚝한 느낌과는 달리 속정 깊고 주변을 살뜰히 챙기는 이로 알려져 있다.

 

“늦둥이로 태어난 막냉이여서 그런가, 부모님과 형들 누나들이 어릴 때부터 잘해주고 예뻐했어요. 그 영향인지 저도 뭐 주변 사람들한테 못하지는 않아요. 도와달라 하면 도와주고, 부탁받으면 거절할 줄 모르고. 누가 돈 필요하다 하면 빚내서라도 주는 스타일이라 그게 문제지.(웃음)”

 

1974년생인 그는 부모가 아들딸 각각 둘씩 낳고 마지막에 본 자식이다. 형과 누나 들은 학교 다녀와도 농사일 거들고 소 꼴 베느라 바빴지만, 그는 막내라고 온갖 집안일에서 면제되는 행운을 누렸다. 어릴 때 했던 일을 곰곰이 생각해봐도 아버지와 뽕잎 주우러 다닌 기억이 전부다. 당시 월평마을에서는 주요 생계로 누에를 많이 쳤고 그의 부모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이 좁아 누에 칠 공간이 따로 없어 잠자는 방에 나무틀을 만들어 거기서 누에를 길렀다고.

 

“누에 먹일라고 밭에 뽕나무를 심어놨거든요. 아버지랑 거 가서 뽕잎 주워오곤 했죠. 부모님이 나한테는 일을 거의 안 시켰는데 그렇다고 시골에 뭐 놀 게 있나요. 학교 갔다 오면 동네 앞 개울에서 수영하고 겨울이면 썰매 타고 그 정도였지.”


어릴 때는 개울에 나가 형들과 고기 잡는 게 유일한 놀이였다. 세 아이 중 맨 오른쪽이 ‘막냉이’ 조경제. (사진제공_조경제)

  

서하초 나와 서상중을 다닐 때까지 공부를 곧잘 했기에,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다든가 무슨 일을 하겠다든가 같은 꿈과 희망은 딱히 없었어도, 인문계 나와 대학 가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은 아예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집안에 갑자기 어려운 일이 닥치고 형편이 기우면서 상업고로 방향을 틀게 된다. 사춘기 소년에게는 충분히 상처가 될 만한 일이었을 텐데, 의외로 그는 덤덤했다고 한다.

 

“그 당시 서하에서 공부 좀 하는 애들은 전부 거창에 있는 고등학교를 갔어요. 거창 가면 학비 말고도 방 얻어야지, 생활비 들지, 내가 봐도 집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더라고. 그래 서상에 있는 상업고에 갔죠. 처음에는 실망도 좀 했겠지만 내가 원래 깊게 생각하고 복잡하게 사는 걸 싫어해요. 그렇다 보니 상고가 오히려 편하더라고. 공부에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친구들이랑 노는 재미에 빠져서 한때는 사고도 많이 쳤죠.(웃음)”

 

짧은 서울살이, 긴 외지생활, 그리고 귀향

 

고등학교 삼 년은 그의 인생에서 거의 유일하게 부모 속 썩이며 산 시절로 남아 있다. 스스로 고백하길 “술 담배는 기본에 학교와 집을 뛰쳐나가기도 했다”고. 다행히 그의 치기 어린 방황은 성인이 되기 전에 막을 내렸고, 졸업 후 그는 아르바이트를 구해 서울에 올라가 생활하게 된다.

 

가까운 부산이나 대구 같은 대도시가 아닌 굳이 서울을 택했던 건 “드라마를 보며 생긴 서울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다. 서울만 가면 왠지 인생이 잘 풀리고 출세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 하지만 환상은 말 그대로 환상일 뿐, 서울은 그에게 적응하기 어렵고 답답한 곳에 불과했다.

 

 

조경제 씨가 고향 떠나 살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처음엔 친구가 소개해준 당구장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호프집에서 서빙도 했는데 나랑 안 맞더라고요. 여자들이 막 담배 심부름을 시키지 않나.(웃음) 술 취한 사람들 상대하는 것도 싫었고. 또 지하철을 서울서 처음 타봤는데 맨날 잘못 내려서 걸어가고 그랬어요.”

 

집안 형님이 운영하는 카센터에서 6개월 일한 것을 끝으로 그는 짧은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온다. 군대도 병역특례를 선택하여 3년간 동네 어른 축사 일을 돕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고 나서 뛰어든 것이 일명 노가다라 불리는 건설 현장 일이다. 마침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라 일할 사람이 필요한 시기였다. 얼마 후 아이엠에프가 터지면서 날이면 날마다 도산과 폐업, 실직 같은 우울한 기사들이 신문 지면을 채웠으나, 조경제 씨에게는 역설적이게도 그때가 ‘호시절’로 기억된다.

 

“당시에 실직자들이 공사판으로 몰려왔어요. 내가 성실하고 일머리 있다는 걸 안 사장이 그때부터 잡부들 관리하는 일을 맡기더라고요. 그걸 한 팔 년 하면서 돈을 좀 벌었죠. 고속도로 공사 끝나고 나서는 몇 년간 외지를 떠돌며 덤프트럭으로 자재 실어나르는 일을 했어요. 그때도 돈은 많이 벌었는데 점점 스트레스가 쌓이더라고요. 일당벌인데 받을 돈을 못 받기도 하고, 업체에서 사람을 좀 막 대한다고 해야 하나. 그러던 중에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시골에 온 거죠. 잘됐다, 시골 가서 슬슬 농사나 짓자,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비결이랄 게 있나요? 때맞춰 알아서 지으면 되는 거지”

 

그가 귀향한 2010년 당시엔 지금만큼은 아니어도 서하면에서 사과 과수원 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다른 작물보다는 그래도 돈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 이번에도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사과를 재배하기로 하고, 아버지 땅을 빌려 사과 농사를 짓고 있던 이웃과 상의해 시설비만 주고 땅을 돌려받았다. 또 그 옆에 붙어 있던 친구 땅을 구매해 모두 1,600여 평을 마련했다.

 

과수원의 고목들을 베어내고 새 사과나무를 심는 그를 보며 친구들은 입을 모아 “니가 무슨 농사를 짓냐”고 했지만, 첫해 경매장에서 그의 사과는 최고가를 받았다. 생초보에, 그 흔한 교육 한 번 받은 적 없이 주변 농부들 어깨너머로 배운 게 전부인 사람치고는 작지 않은 성과를 거둔 셈이다. 누가 그 비결을 물어보면 그는 “알아서 지으면 된다”고 대답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다소 어처구니없게 느껴질지 몰라도, 실제로 그가 한 건 때에 맞춰 꽃 따고 열매 따고 약 준 게 전부였다.

 

“일단은 일이 재밌더라고요. 또 사과금이 높게 나오니까 할 만하다 했죠.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가격이 너무 안 좋아요. 또 품값이 해마다 오르다 보니까 사과 팔아 인건비도 안 나올 판이에요. 코로나 이후로는 외국인이 없어서 품을 사기도 어렵고. 요즘은 웬만한 건 혼자 합니다. 원래도 사람은 가끔 썼는데 지금은 아주 바쁠 때만 주말에 친구들을 불러요.”

  

과수원에서 풀 작업 중인 조경제 씨.


사계절 쉴 때가 따로 없는 게 사과 농사라고들 하는데 조경제 씨는 ‘홍로’ 품종만 재배해서 상대적으로 덜 바쁜 편이다. 적화 적과 끝나면 풀 관리 외에는 특별하게 신경 쓸 게 없어 계곡 낚시 다니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대신 저장성 약한 홍로는 “무조건 추석 전에 다 팔아야” 하는 게 부담이다. 공판장에만 내서는 돈이 안 되니까 이때도 역시 ‘친구 찬스’를 쓴다. 사업하는 친구들이 많이 팔아줘서 그나마 수지를 맞출 수 있다는 얘기.

 

“함양에서는 그래도 서하 사과가 크고 품질도 좋거든요? 그런데 중간 마진이 원체 세서 농부들에게 돌아오는 게 별로 없어요. 지역 농부들이 단합해서 어느 정도 가격을 정하고 그걸 고수하면 좋은데 쉽지 않아요. 보통은 누가 좀 값을 더 쳐준다고 하면 팔고, 또 안 팔리면 값을 확 낮춰버리니까.”

 

귀농,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살길은 있어

 

그가 볼 때 농부의 어려움은 “농사를 잘 짓는다고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래도 이 일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들은 어떻게든 농사지어 살아간다. 하지만 귀농은 또 다른 문제다. 정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데 그 시간을 기꺼이 감내하는 마음 자세랄까 태도가 필요하다. 더욱이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집이며 땅 가격이 너무 올라서 귀농하기가 쉽지 않다는데.

 

“전에 집과 땅을 알아봐 준 후배들이 꽤 돼요. 귀농했다 하면 좀 대단하게 보였거든요? 그렇잖아요. 굳이 이 시골에 들어와 산다는 게. 그래서 왠지 잘해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었죠. 지금은 뭐 다들 저보다 잘 삽니다.(웃음) 이제는 집이고 땅이고 비싸기도 하고 나오는 게 별로 없어서 귀농이 어려워요. 제 생각엔 군에서 귀농단지를 만들어 땅과 집을 싸게 분양하지 않는 이상은 사람이 들어오기는 어려울 것 같애요. 공기 좋다 물 좋다 이것만으로 사람을 끌어들이기엔 한계가 있잖아요. 그래도 일단 들어와서 열심히 하면 먹고는 살죠. 여긴 늘 인부가 부족하니까. 농사뿐 아니라 다른 일도 놉2)이 없어서 나한테 사람 좀 구해달라는 이들이 많아요. 또 겨울에는 곶감 하면 수익이 되죠. 서하는 사과도 그렇지만 곶감도 알아주거든요. 서하 곶감만의 ‘주렁이’3) 기술이 있어요. 이런 일이라도 얼마든지 하겠다 하면 주변에서 많이들 도와주니까 살고도 남지.”


2) 그날그날 품삯과 음식을 받고 일을 하는 사람.

3) 곶감 한 접(100개)을 타래로 엮어 둥글고 길게 매단 것으로, 이 지역에서는 타래곶감, 주렁이, 줄줄이라 한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시골에 정착하는 데 필요한 것이 꼭 돈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를 잘 맺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가 귀향 후 이런저런 단체와 기관에서 ‘몸 쓰는’ 일을 도맡아 해온 데도 알고 보면 그런 이유가 있었다. 천성이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력 드문 시골에서 누군가 해야 하고 맡아야 할 일이 있다면 그냥 내가 하자는 생각으로 움직였다는 것. 보상을 바라고 시작한 건 아니지만, 지역 일을 제 일처럼 나서서 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좀 더 마음을 내어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서하면 방범대 총무를 한 십 년 하다가 얼마 전에 그만뒀고, 체육회 총무는 거의 십오 년째 하고 있어요. 청년회 일도 했고 서하초동문회 총무도 맡고 있고. 총무가 하는 일은 몸 쓰는 거죠. 해마다 8월 15일에 면체육대회를 하는데 그때 천막 치고 의자 놓고 하는 것부터 이벤트 진행자 섭외까지, 그냥 실무적인 거는 전부 하는 거예요. 청년회에서 하는 5월 8일 어버이날 행사도 마찬가지고요. 처음엔 다 형님들뿐이고 내가 제일 어려서 일을 맡아 했는데, 지금은 귀농한 이삼십 대 후배들이 있으니까 불러다 막 시킵니다.(웃음)”

 



서하면 어버이날 행사(위)와 면체육대회 사진 (아래)


주민들이 서로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고받을 때 시골은 비로소 살 만한 터전이 된다. 조경제 씨가 서하면에서 체육회, 청년회, 서하초동문회 등 여러 기관의 일을 맡아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사진제공_조경제)

 

 


시골 인심이 전 같지 않다고들 하고 그이 역시 그 말에 동감하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씩 남녀노소 다 같이 모여 행사를 할 때나 동네 선후배들과 둘러앉아 막걸리 한 잔에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누군가에게 생긴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서로 도우려는 것을 볼 때면 아직은 시골이 살 만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느낌이 참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바라게 된다. 앞으로도 이 지역이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살 만한’ 터전이 되기를.

 

목표도 꿈도 없이, 다만 지금 삶에 만족해

 

“어릴 땐 학교 갈 시간이 되면 마을 애들이 전부 회관 앞에 모였어요. 6학년 중에서도 대장인 형이 마을 깃발을 들고 앞장을 서요. 그러면 나머지 애들이 그 뒤로 줄을 서서 학교까지 걸어가는 거지. 그때 같이 있던 친구들이 거의 다 도시에 나가 있는데 육십 넘으면 다시 들어올 생각들을 하더라고요. 제가 그랬어요. 돈 많이 벌어서 들어오라고. 그지 돼서 들어오면 안 만나준다고.(웃음)”

 

그 시절 동네 형 누나 따라 학교에 걸어가던 조씨 집안 ‘막냉이’ 꼬마가 어느새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어 마을과 지역에 두 발을 딛고 든든히 서 있다. 어머니에게는 누구보다 살가운 아들로, 주민들에게는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를 시원시원하게 해내는 일꾼으로, 또 고향 친구들과 동네 선후배에게는 언제 찾아가도 환대해주고 무슨 문제든 제 일처럼 나서주는 듬직한 벗으로 살고 있다 할까.

 

이런 삶이 꽤 만족스럽고 편안하기에 그에게는 별다른 목표나 꿈이 없다. 매해 정월 초하루가 되면 “술 끊고 담배 끊고 장가간다”는 계획을 세워보지만, 이 또한 해마다 반복되는 의례적인 절차일 뿐 꼭 이뤄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올해도 벌써 반이 지났는데 그는 여전히 술을 즐기고 담배를 피운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마침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 이에 관한 자세한 얘기가 궁금한 이들은 그의 아지트인 창고로 가보시라. 그날 운이 따라준다면 당신은 그의 연애담을 듣는 것에 더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조경제표 어탕까지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이 요청한 일을 봐주는 조경제 씨. 그의 창고엔 오늘도 그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함양군 서쪽 아래에 자리한 서하면. 사시사철 꽃과 나무와 물이 아름답다고 하여 화림동 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에는 오래도록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 삶의 다른 길을 찾아 걸어들어온 귀농 귀촌인들, 최근 이주해온 젊은 부부와 청년들도 있습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는 이처럼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서하를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서하다움'이란 큰 그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자 합니다.


인터뷰 및 글_자야 jayams@naver.com

사진_김한범 bombbu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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