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서하면 봉전마을 이길응 어르신

202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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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내 숨구멍이고, 사는 재미고, 꿈이야”

 


1939년에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전에 일본을 빠져나와 아버지 고향인 경북 김천 구성면에 정착해 살다가 육이오 전쟁통에 대구로 거처를 옮겼다.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지만 일본에서 기술을 습득한 아버지와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 덕분에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고, 이것은 이후 삶의 큰 자산이 된다. 결혼과 동시에 서하면 봉전마을에 들어오고 나서는 여성이 ‘계몽’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안을 건사하고 마을 및 학교 일을 도왔다. 답답한 삶에 스스로 숨구멍을 내며 살아온 이길응 어르신은, 최근 글쓰기의 기쁨과 재미에 푹 빠져 한 세기 분량에 달하는 자서전을 집필 중이다.

 

“나에게 서하란?

내 생을 바쳤고 끝내 묻힐 곳이지.”


 

이길응 어르신이 혼자 사시는 봉전마을 집 앞 별채와 텃밭.


아침에 일어나면 불편한 허리를 단단히 동여매고 청소를 한다. 혼자 살아도 치워야 할 것, 정리해야 할 것은 끊임없이 나온다. 마주할 이 없는 밥상 또한 단출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렇다고 밥 안치고 찬 만드는 일을 아주 안 할 수는 없다. 집 앞 텃밭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들여다보며 때맞춰 풀 매고 물도 주어야 한다.

 

수십 년을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는 이런 일상이 힘에 부치고 성가실 때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조차도 내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그처럼 경건한 마음이 하루 중 가장 깊어지는 시간은 글을 쓸 때다. “팔십 대 중반 나이에 내 손으로 인생을 기록하”고 있음을 자각할 때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한 감정이 정수리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글쓰기는 작년부터 했어요. 집에서도 쓰고, 매주 화요일에는 도서관 가서 사람들하고 같이 써요. 나 살아온 걸 쓰는 거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요즘은 여기 봉전마을로 시집와 애들 낳고 키우는 시절로 넘어왔어. 맨 처음 얘기? 그거는 일본이 배경이라. 내가 거서 태어났으니까.”

 

생의 첫 페이지는 바다 건너 일본이라

 

이길응 어르신은 1939년에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먹고살 길을 찾아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자리를 잡은 부모(아버지 이도화, 어머니 송원순) 덕분에, 자녀들은 적어도 일본에 있을 때만은 부족함 없이 자랐다.

 

“내 위로 언니가 하나 있거든. 그 언니 세 살 때 부모님이 일본에 와서 아버지가 운전 기술을 배워 그걸로 먹고살았대요. 나랑 밑으로 두 동생은 거서 태어났고. 우리가 강제로 점령당한 역사 때문에 일본을 싫어하지만서도 내가 어릴 때 본 일본인들은 참 검소하고 부지런했어. 또 그때는 일본이 우리보다 교육이니 문화니 모든 면에서 앞서갔잖아요. 그래선가 일본서는 고생을 몰랐지.”

 

해방되기 전해인 1944년. 일본에 곧 원자폭탄이 떨어질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주변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때 둘째인 길응은 여섯 살이었고, 위아래로 각각 세 살 두 살 터울인 언니와 여동생이, 그리고 그 밑으로 더 어린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딸만 내리 셋을 낳고 ‘겨우’ 본 아들을 부모는 애지중지했다. 가부장제에 남아선호사상이 극심한 시대였으니 오죽했을까. 급기야 아버지는 언제 떨어질지 모를 원자폭탄에 혹시라도 “아들 잃을까 두려워” 밀항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우리야 아무것도 모르고 어른들 따라 배를 탔지. 구명조끼가 애들용이 없어서 어른 걸 입었는데 압력이 세서 아주 죽겠더라고. 숨이 턱턱 막혀가지고 딸 서이서 엄마 곁에 꼭 달라붙어 울고 짜고 했던 게 지금도 생각나.”

 

무사히 고국에 도착한 그들 가족은 부산을 거쳐 아버지 고향이자 친인척이 모여 사는 경북 김천시 구성면으로 향했다. 어른들에게는 ‘꿈에 그리던’ 고국이고 고향일지 몰라도 어린 길응에게는 모든 게 낯설고 고단하기만 했다. 철없는 나이라지만 남의 집에 얹혀사는 사정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다. 일본에서 가져온 ‘세라복’1) 입고 자매 셋이 모여 앉아 일본어로 종알거리면, 동네 사람들이 그 ‘괴이한’ 장면을 보기 위해 구경을 다 올 정도였다고.


1) ‘세일러복’의 비표준어. 해군 병사들이 입는 군복을 본떠서 만든 옷을 말한다.


 

낯선 고국, 잇따른 시련, 그리고 되찾은 웃음

 

아버지는 일본에서 모은 돈으로 고향에 가족들과 살 집을 지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해에 수해가 나면서 ‘큰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 돈은 전부 큰집 재건하는 데 들어갔다. 빈털터리가 된 아버지는 일본에 가 돈을 벌어 부치겠다며 다시 바다를 건넜다. 가족에게 큰 시련이 닥친 건 아버지가 떠난 직후의 일이다.

 

“갑자기 남동생이 시름시름 앓더라고. 일본에 간 아버지는 어떻게 그 소식을 들었는지 아들 살린다고 한국행 밀선을 타다가 걸려서 감옥에 갇힌 거예요. 그러는 사이 동생은 그만 세상 베렸고. 그러니 엄마 심정이 어땠겠어. 남편은 바다 건너 감옥에 있지, 애지중지하던 아들은 죽었지, 먹이고 입혀야 할 애들은 딸 셋에 죽은 동생 밑으로 태어난 갓난쟁이까지 있었으니….”

 

또렷한 기억력으로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이길응 어르신.

  

자식 잃은 큰 슬픔을 감당하다 못해 기어이 정신을 놓아버린 엄마는 매일 죽은 아들 무덤에 가서 울기만 했고, 보살핌을 받지 못한 다른 자녀들은 굶기 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의 한 여자 어른이 엄마를 찾아와 “이걸 읽으면 잠이 잘 오고 편안해질 것”이라며 책 한 권을 건넨다. 바로 성경책이었다.


“성경이 전체가 다 있는 게 아니라 마태, 마가 같은 사복음서만 묶어놓은 분권이었어요. 엄마가 교육을 받지는 못했어도 한글을 아니까 그걸 계속 읽고 교회도 열심히 나갔지. 일가 어른들이 ‘조상님 노하신다’고 교회 가는 걸 싫어해서 일부러 먼 데 있는 교회를 다녔는데, 엄마 혼자 보내는 게 걱정이 돼서 딸들이 돌아가며 동행을 했어. 한 주는 언니가 따라가고, 한 주는 내가, 다음엔 동생이 가는 식으로.”

 

신앙에 의지해 엄마는 맑은 정신을 되찾았고, 얼마 후 일본 감옥에서 풀려나 돌아온 아버지는 집안 어른 소개로 학교 서무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물레방앗간을 맡아 했다. 생계가 안정되면서 가족은 비로소 남의 집에서 벗어나 독립할 수 있었다. 더는 아픈 아이도 없었다. 얼마 뒤 막내딸까지 태어나자 가족은 서서히 슬픔을 지우고 웃음을 되찾아갔다.

 

그러던 중 육이오 전쟁이 발발한다. 길응이 임천국민학교2) 5학년에 재학 중일 때다. 피난을 가지 않은 대신 그 동네 사람들은 인민군들이 따발총 메고 들어와 두 달간 “인민정치” 하는 걸 직접 경험했다. 말이 인민정치지 밥해서 군인들 먹이는 게 전부였기에 주민들은 끼니때마다 기르던 닭이며 돼지를 잡고 쌀독 털어 밥상을 차렸다. 몇 달 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인민군들은 퇴각했고, 잠시 몸을 피했던 아버지는 돌아오자마자 가족을 데리고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대구로 갔다.


2) 현재의 임천초등학교. 김천시 구성면 임천리에 있다.



전쟁 후 폐허에서도 ‘배움’의 끈 놓지 않아

 

“대구 가서 보니까 완전히 아수라장이야.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남자들을 다 잡아갔거든. 이번에는 국군이 길에서 청년만 보면 데려가더라고. 우리 아버지는 운전을 잘하니까 군속 운전병이 됐는데 전방으로 안 가려고 엄마하고 작전을 짰어요. 교회 집사님이 빌려준 돈으로 정종 한 병이랑 비스켓 세트랑 사서 중대장 집엘 찾아간 거야. 그게 멕혔는지는 몰라도 아버지가 전방으로 안 빠지고 대구에서 거창 비계산에 있는 군부대에 물자 수송하는 일을 하게 됐지. 그래도 뭐 살기는 힘들어서 엄마가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빌린 집에다 하숙 치고, 길에 나가 장사도 하고. 그렇게 어려운 시절에도 부모님이 학교는 꼭 가야 한다고 해서 우리 남매 전부 학교는 빠지지 않고 다녔어요.”

 

휴전 후 미군이 두고 간 ‘지엠트럭’을 육군부대로부터 빌려 유통 사업을 시작한 아버지는 거창에 자리를 잡고 가족들을 불렀다. 대구에서 성명중학교를 졸업한 길응은 현재 중앙고의 전신인 거창상고로 진학했다. “수학 싫어하고 국어를 좋아한” 전형적인 문학소녀였던 그는, 학교 다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며 종종 회지에 글도 실었다.

 

거창상고 친구들과 함께. (맨 뒤 가운데에 선 이가 여고생 이길응이다.)

 

1950년대 중반, 고등학교에 다니던 여학생들의 뒷모습. 학교에 있던 연못에 친구들과 구경 가던 장면이라고, 이길응 어르신은 기억하고 있다.

 

“우리 엄마가 동생들 업어 키우면서 어깨너머로 어문을 뗐거든요? 또 결혼해서 일본에 살 때는 여자들이 전부 학교 다니고 일하는 거 보고 엄청 부러워했어요. 그러더니 나중에 자식들 다 키워놓고 여유가 생기니까 글을 좀 쓰시더라고. 어디 구경하고 오면 삐뚤빼뚤 써 와서 딸들한테 보여주는 거야. 이거 어떠냐 하시면서. 그런 거 보면 내가 엄마를 많이 닮은 거 같애.”

 

부모의 교육열과 본인의 의지 덕분에 상고까지 나왔으나 막상 졸업하고 보니 취직할 데가 없었다. 같은 학교를 졸업한 여학생이 15명 정도 되었는데 다들 처지가 비슷했다. 집에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던 그때, 길응을 불러준 건 교회였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포기한 아이들을 가르쳐보라며 교회에서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언니가 하던 일을 둘째인 길응이 물려받았고, 나중에 반이 늘어나면서 밑의 여동생도 그 일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몇 년 아이들을 가르치던 길응은 스물다섯 되던 해에 교회 전도사 소개로 만난 남자 전병우와 결혼을 한다. 남자는 서른여섯으로 나이 차이가 좀 났다. 그래도 직업이 괜찮고 성실해 보여 마음에 들었다고.

 

“내가 언젠가 글로도 썼지만, 남자가 장가들라고 여자한테 하는 소리는 믿을 게 못 돼. 그 양반도 결혼 전에는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준다, 달마다 여원3) 한 권씩 사준다, 거창으로 목욕탕 보내준다고 단단히 약속했다니까?(웃음) 결혼해서 시댁인 함양 봉전마을에 들어왔는데 처음엔 갑갑하더라고. 아는 사람이 있어 뭐가 있어. 영화를 볼 수 있나 책을 살 수 있나. 거기다 겨울은 또 왜 그리 긴지.”


3) 당시 인기를 끌던 여성 잡지.


 

스물다섯의 이길응은 소개로 만난 남자 전병우와 결혼하여 서하면 봉전마을로 들어왔다.

 

“답답허니 내가 숨통을 내버렸지!”

 

그 시절에 대한 글을 쓰면 지금도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첫딸 돌 지나고 맞은 겨울이었다. 당시 시골 남자들은 겨울철만 되면 허름한 주막집 같은 데 모여 막걸리 마시며 화투 치는 게 일이었는데, 젊고 진취적인 새댁 이길응의 눈에는 그것만큼 한심해 보이는 게 없었다. 심지어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남편도 저녁 먹고 나가 그 자리에 끼면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기 일쑤니 그때마다 울화가 치솟곤 했다.

 

어느 날 저녁, 마침내 일이 터지고 만다. 딸을 업고 동네를 서성이다 주막집 처마 아래 놓인 남자들의 고무신을 보고 분노한 새댁이 그것들을 전부 도랑에 갖다 내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집에 가서 아이 기저귀 가방 하나만 챙겨 들고 시외버스터미널로 달려갔다는데.

 

“진주 사는 시숙 집으로 갔지. 그 시숙이 집안 둘째 아들인데 막내인 남편을 함양초부터 진주농업학교까지 공부시킨 양반이라. 내가 가서 이러이러하여 너무 속상하다 하니까 당장 편지를 쓰더라고. 힘들게 공부 가르쳐 놨더니 어디 술 먹고 화투나 치고 앉았냐고. 그 편지 덕을 좀 봤어요. 집에 돌아갔는데 시어머니가 화를 안 내시더라고. 남편도 미안한지 괜히 베시시 웃기나 하고.(웃음)”

 

시골 마을은 여러 가지로 답답했으나 일이 많아서 심심할 틈은 없었다. 훗날 농협 조합장으로 퇴임한 남편은 젊을 때부터 직장 일 외에는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농사며 집안일이며 시어머니 생전 병구완은 전부 아내 차지였다.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지었지만 논 열네 마지기에 밭도 규모가 꽤 커서 여자 혼자 그걸 제대로 관리하려면 품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60~70년대 가속화된 산업화로 인력이 도시로 죄다 빠져나가는 바람에 나중에는 관리기며 경운기 같은 기기도 손수 다뤄야 했다.

 

읽고 쓰는 것을 잘하는 데다 상고를 나와 장부 정리에 능했던 그는 또 마을 일도 틈틈이 도왔다. 나서서 감투 쓰는 것은 안 해도 회계와 서기는 도맡아 했다고. 언젠가 부녀회에서 농협 물품을 위탁받아 동네 교회를 중심으로 판매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남긴 수익으로 ‘마을 부녀자 단체여행’을 최초로 추진한 것 역시 그이였다.

 

이길응 어르신이 젊은 시절에 주선하여 떠난 ‘마을 부녀자 단체여행’ 사진. (서 있는 사람들 앞줄 중간에서 약간 오른쪽에, 당시 만삭이던 새댁 이길응이 보인다.)

  

“그때 봉전에 오십 호 정도가 살고 있었어요. 할매들 포함해 부녀자가 많았는데 한 번도 차 타고 여행이란 걸 가본 적이 없는 거야. 그래 내가 이장님한테 물건 팔고 이만큼 돈을 남겼으니 여자들 데리고 여행 가자 했지. 당시엔 관광차가 없어서 직행버스를 타고 해인사 갔다가 거창 수승대까지 들렀어. 남자는 이장님하고 새마을지도자 딱 두 명 가고 나머지는 다 여자들인데, 자리가 모자라서 빼빼한 할매들은 의자 두 개에 셋씩 앉고 그랬다고.(웃음)”

 

‘계몽’이 필요한 시대에 ‘여성’으로 산다는 것

 

농사도 짓고 마을 일도 했지만 결혼 후 20년은 무엇보다 자식 낳아 키운 시간으로 기록될 만하다. 남다른 교육열을 지닌 부모 밑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는 자부심이 강했던 만큼, 학부모 이길응이 교육에 대해 거는 기대는 컸다. 또한 그는 농촌 지역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먼저 어른이 ‘계몽’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그래야 아이들의 학습력뿐 아니라 인성도 균형 있게 발달할 거라 믿었다.

 

“그래서 내가 남자들의 술판과 화투판을 그토록 싫어했던 거야. 애들이 그거 보고 뭘 배우겠어요? 우리 애들은 아예 화투의 화 자도 모르게 하려고 내가 직접 장기판이랑 알까지 다 만들어서 장기를 가르쳐줬다니까.”

 

딸 둘 아들 둘이 차례로 봉전국민학교에 입학해 졸업하는 사이, 그는 봉전국민학교 어머니회 회장만 15년을 맡아 했다. 당시 서하면에서 봉전국민학교 학구로 묶인 곳은 반정, 우전, 다곡, 황산, 호성 등 5개 마을로, 규모는 꽤 컸으나 그 시절 여느 시골 학교들처럼 사정은 넉넉하지 못했다. 학교는 정해진 교과과정을 가르치는 것 외에 그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교사와 학부모 들은 그런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게 안타까워서 내가 어머니회 회장 할 때는 학부형들한테 조금씩 돈을 걷어 시험지를 샀어요. 학교에서는 교과서 말고는 아무것도 못 보니까 애들 학습력이 떨어지잖아. 그래서 우리 돈으로 공부를 좀 시켜보자 한 거지. 그때는 돈 주면 시험지 배달하는 사람이 있었거든. 또 한번은 학교에 스피커도 사줬어요. 쌀 한 되씩 걷어서.(웃음) 그게 없으니까 운동장에 모여서 뭘 해도 뒤에서는 하나도 안 들리더라고. 겨울이면 난로에 때라고 장작도 해서 부지런히 날랐고. 그러고 보면 부모들이 참 애 많이 썼지.”

 

자녀 넷을 모두 봉전초에 보낸 이길응 어르신은 한창 아이들 자랄 땐 봉전초어머니회 회장만 15년을 했다고 한다. (아랫줄 맨 오른쪽에 앉은 이가 어머니회 활동하던 시기의 이길응 씨.)

 

지금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농촌 학부모들은 산에서 들에서 일하느라 바빴다. 특히 여자들은 농사에 가사노동까지 떠맡느라 학교에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학년 소풍날 보호자로 애들 따라오는 사람도 죄다 할머니들뿐, 엄마가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머니회 회장으로서 그게 늘 마음에 걸렸던 이길응은 작정하고 어버이날 오후에 ‘엄마’들을 학교로 불러 모았다. 교장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 빌려 놓은 교실 하나가 엄마들만의 ‘비밀스러운’ 회합 장소였다.

 

“거서 뭘 했냐. 춤추고 놀았지 뭐.(웃음) 원없이 노래하고 춤추고 가게끔 자리를 마련한 거야. 하루만이라도 스트레스 해소하고 가슴에 쌓인 분도 풀라고. 나중에는 내가 계를 들자 했어요. 그래야 애들 졸업하고도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이름이 ‘샛별계’인데 처음엔 집마다 다니면서 모임을 하다가 나중엔 바깥으로 놀러 다녔지. 설악산도 가고 금강산에 독도도 가고. 좋은 데는 다 갔어요. 그런 재미도 없이 시골 엄마들이 어떻게 살아, 답답해서.”


“언제 이뤄질랑가는 몰라도 책 한 권은 남기려고”

 

젊은 날의 이길응은 ‘답답하면 못 사는’ 사람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현실에 갇혀 질식해가는 대신, 바늘구멍만큼이라도 작은 틈을 내고 스스로 숨쉬기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 늦은 저녁, 남정네들의 신발을 도랑에 처넣고 어린 딸 둘러업은 채 집 나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바깥바람 쐬어본 적 없는 동네 ‘부녀자’들 불러모아 단체여행 떠나는 게, 엄마들 가슴에 쌓인 분 풀라고 학교 교실 하나를 통째로 빌려 가무의 판을 벌이는 게 그 시절 그 나이에 어디 그리 쉽기만 했을까?

 

이제 세월이 흘러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지금, 어르신은 젊은 시절과 달리 한없이 고요한 ‘글쓰기’를 통해 일상에 숨구멍을 내고 있다. 과거에 채 해소하지 못한 응어리들이 올라올 때, 어느 순간 불현듯 외로움과 쓸쓸함이 해일처럼 밀려올 때도 그에 갇히는 대신 펜을 듦으로써 생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틈을 살며시 열어주는 것이다.

 

“글 쓰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제2의 생을 사는 거 같아. 나 개인의 이야기를 쓰는 거지만 우리 세대는 한 세기를 살았잖아요. 일제강점기에 해방기에 전쟁도 다 겪었고. 그러니 내가 이 자서전을 완성하면 나의 유산도 되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거라고 생각해. 언제 이뤄질랑가는 몰라도.”

 

헤어질 무렵, 어르신이 슬쩍 종이 하나를 내미신다. 가까운 지인에게 타이핑과 프린트를 부탁했다는 글의 제목은 ‘꿈’이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소원보다 꿈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한 세기를 살아온 할머니가 무슨 꿈이 있냐고? … 문학의 꿈을 펴볼 수 없는 주위환경과 너무 좁은 시야 속에 혼자 발버둥 치다 뒤늦게 용기를 얻어 잠자던 내 꿈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어르신의 글에 화답하여 짧은 답글을 남겨본다. 우리는 독자로서 당신이라는 책을 펼쳐보는 기쁨을 누릴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고. 그러니 어서 쓰시라고. 이제 막 기지개 켜기 시작한 꿈을 절대 포기하지 마시라고. 그를 위해 부디 건강하시라고.

  

멀리서 바라본 봉전마을 풍경. 짙은 산그늘 아래 두 개의 교회 첨탑이 우뚝 솟은 저 마을에서 이길응 어르신은 반세기가 넘는 삶을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은 과거에 몰랐던 새로운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설렘 속에 맞이하고 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함양군 서쪽 아래에 자리한 서하면. 사시사철 꽃과 나무와 물이 아름답다고 하여 화림동 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에는 오래도록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 삶의 다른 길을 찾아 걸어들어온 귀농 귀촌인들, 최근 이주해온 젊은 부부와 청년들도 있습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는 이처럼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서하를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서하다움'이란 큰 그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자 합니다.


인터뷰 및 글_자야 jayams@naver.com

사진_김한범 bombbu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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