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송계마을 유태성 이장

2022-05-23
조회수 831

야무지고 단단하게, 그리고 ‘스마트’하게

 

함양군 서하면 송계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20대 중반에 부산에서 생활하며 가정을 꾸렸으나 홀로 된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결혼 3년째 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체구는 작아도 근력이 있어 몸으로 하는 노동에 강한 편이며, 타고난 붙임성으로 사람과 섞이고 어울리는 일을 잘한다. 이런 ‘재질’을 썩히지 않고 서하면의 ‘수도’라는 송계마을 이장을 맡아 소임을 다하고 있는 유태성 씨.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 ‘콩’처럼, 단단하면서도 씹을수록 구수한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 


“나에게 서하란?

고향이죠. 어머니 품속처럼 편안한.”



 지난 4월 30일 서하면 보건지소 앞 주차장에서 열린 ‘서하봄놀장’ 풍경. 평소 조용하던 마을이 이날은 사람들의 발걸음과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사진제공_채홍필)

 

서하면 보건지소 앞이 시끌벅적하다. 평소 같으면 차 몇 대 얌전히 놓여 있을 조용한 공간에 장1)이 들어선 것. 오일장이 없어 멀게는 함양읍과 거창으로, 가깝게는 서상과 안의로 다니는 동네 주민들이 조금은 들뜬 표정으로 나와 장터 구경을 한다. 저거 하나 주소. 어떤 아주머니는 두메부추와 명이나물 모종을 한 묶음씩 사고, 양복을 잘 차려입은 한 아저씨는 좌판에 놓인 구두를 신어보고는 딱 맞네, 하며 값을 치른다. 또 위아래 꽃무늬 차림의 할머니들과 머리에 중절모를 얹은 할아버지들은 사방을 휘휘 둘러보다 먹거리 천막 아래 모여 앉아 사는 이야기에 한창이다.


1) 문화관광체육부의 ‘문화가 있는 날 지역 특성화 사업’으로 선정돼 2019년부터 함양읍에서 달마다 한 번 열리는 ‘문화놀이장날’을 말한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와 서하면의 협의에 의해 2022년 첫 장이 ‘서하봄놀장’이라는 이름으로 4월 30일 면 소재지인 송계마을에서 열렸다.



4월 30일 토요일.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 서하면 한가운데서 가장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송계마을 유태성 이장이다. 장이 서기 전부터 마을 회의를 통해 주민들의 협조를 구하고 주차장 청소하느라 바빴던 그는, 행사 당일에도 동네 어르신들에게 인사하랴, 멀리서 걸음해준 지인들 챙기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와중에 흥겨운 음악이 나오면 무대 앞으로 나가 춤까지 추는 그를 보면서 누구든 이런 생각을 했음 직하다. 저이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구나. 아니면 이 순간을 정말로 즐기고 있거나.

 

변화는 그를 춤추게 한다

 

“토요일 장터요? 아, 신났지. 춤이 저절로 춰지더라고.(웃음) 시골 마을이 그렇잖아요. 나이 든 사람들만 있다 보니까 모든 게 느리고 정체되는 것 같고. 그런데 요즘 송계마을은 점점 살아나는 게 느껴져요. 임대주택 단지가 생기면서 젊은 부모들과 아이들이 들어와서 활동하니까. 이 카페만 해도 얼마나 좋아요. 솔직히 전에는 손님이 와도 갈 데가 없었어요. 지금은 여기 모여서 회의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합니다. 술집 가는 거랑은 또 다르거든요. 술집 가서 뭐 좀 의논하려고 하면 큰소리나 치고 안돼요. 나오는 얘기나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고.”

 

청년레지던시 플랫폼 <서하다움>과 함께 송계마을에 들어선 <카페서하>. 유태성 이장은 이곳에서 사람 만나 대화하고 회의하는 것을 좋아한다.


유태성 이장의 말마따나 면 소재지인 송계마을은 서하면에 일고 있는 변화의 중심지다. 최근 이삼 년 사이, 서하초 살리기에서 시작된 바람이 LH(한국토지주택공사) 임대주택 단지 조성으로 이어지면서 도시에 살던 다자녀 가구가 이 마을로 많이 이주해 들어왔다.

 

작년 말에 청년레지던스 플랫폼 <서하다움>과 <카페서하>가 문을 연 것도 변화를 부채질하는 한 요인이다. 유명한 관광지도 아닌데 여기 누가 오겠냐는 예상을 깨고, 카페는 면의 젊은 인력부터 동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게까지 고른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서하다움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다른 삶’에 목마른 청년들을 불러모으는 역할을 한다. 찾아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비록 짧게 왔다 가는 이방인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머무는 동안 마을엔 뭔지 모를 활력이 돌고 떠난 후에는 잔상이 남는다.


서하다움에서 진행하는 ‘3주살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도시 청년들이 송계마을에 벽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_채홍필)

 

“일종의 나비효과라 할까, 나는 그런 걸 느껴요. 뭐 하나 새로운 게 생기고 사람이 들락거리고 하면 알게 모르게 그 영향이 전체에 스며드는 거라. 노인들은 아무리 수가 많아도 다 문 닫고 조용히 있거든. 그런데 지금은 골목에서 사람 소리 나고 애들 뛰어다니고 하니 반갑죠. 이 카페 주변에 낯선 청년들이 왔다 갔다 하니까 생동감도 있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장은 새로운 걸 잘 받아들여야 해요. 옛날처럼 허름하게 입고 새마을 모자 쓰고 그럴 필요 없잖아요?(웃음) 기왕이면 옷차림도 생각도 스마트해져야지.”

 

떠남도 돌아옴도 순리대로 했을 뿐

 

올해 환갑을 맞아 처음으로 마을 이장을 하게 된 유태성 씨는 송계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주민이다. 7남매 중 차남으로, 형제자매 중 고향에 남은 사람은 그이가 유일하다. 그 역시 한창 젊을 때는 부모 집을 떠나 산 적이 있다. 군대에서 막 제대한 스물다섯 무렵, “시골에 있으면 장가 못 간다”고 아버지가 등 떠밀어 간 곳이 부산이었다. 거기서 남들처럼 직장생활도 해보았지만 어디에 매이는 걸 싫어하여 한 군데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고. 이를 두고 아내 이례순 씨는 지금도 종종 “퇴직금 한 번 못 탄 남자랑 산다”며 놀리곤 한다.

 

“친구들 다 도시로 나갈 때도 나는 딱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나갔지. 여기 촌구석에 박혀 있으면 여자 못 만난다고 해서.(웃음) 부산 가서 일하던 중에 산악회 활동을 했거든요. 거기서 아내를 만났어요. 둘이 결혼하기로 하고 충청도에 있는 처가를 가니까 손위처남이 묻더라고. 결혼하면 혹시 시골 내려가는 거 아니냐고.(웃음) 절대 아니라고 했는데 결혼한 지 몇 년 됐을 때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혼자되면서 내려왔어요.”

 

젊은 시절, 고향 친구들과 함께한 유태성(가운데) 씨. (사진제공_유태성)

 

부산에 살 때 찍은 데이트 사진. 유태성 씨는 당시 연인이던 이례순 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사진제공_유태성)


농촌 출신 중에는 시골살이에 대한 좋은 추억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도 많지만, 반대로 어릴 때부터 심하게 고생한 탓에 농사라면 학을 떼고 시골이라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젓는 이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유태성 씨로 말하면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시골에 살 때 도시에 대한 선망이 크지 않았듯, 도시로 간 뒤에 시골 생각이 간절한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의 출향과 귀향은 그때그때 주어진 삶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자 순리를 따른 결과라 할까.

 

어린 시절을 더듬어봐도 그에게는 아주 좋았다거나 싫었다거나 할 만한 기억이 거의 없다. 다들 형편이 어려웠기에 특별히 ‘나’의 가난을 의식하고 살지 않았다. 학교 가서 수업 듣고 시간 나면 아이들과 공차다가 방과 후 염소 풀 먹이고 꼴 베러 다니는 일상에 그저 충실했을 뿐.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때로는 기쁘기도, 때로는 외롭고 슬프기도 했겠지만, 그 모든 감정이 물처럼 흘러간 지금 그의 마음은 한없이 담담하기만 하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셨는데 크게 넉넉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감사한 게 뭐냐면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을 차등 없이 공부시켰다는 거. 아버지가 늘 하신 말씀이, 누구는 공부시키고 누구는 안 시키면 나중에 문제 생긴다는 거였거든요. 실제로 예전엔 장남이나 아들만 학교 보내는 집이 많았어요. 나 국민학교2) 졸업할 때만 해도 절반은 중학교에 못 갔으니까.”


2) 초등학교의 이전 말. 여기서는 화자의 입말을 그대로 살려 썼다.


 

‘노가다’에서 시작해 딱 맞는 ‘천직’ 찾기까지

 

서하초등학교 40회 졸업생인 그는 서상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당시 고졸이면 평범한 사무직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에겐 날마다 출퇴근 도장 찍으며 책상 앞에서 일하는 자체가 어색하고 답답했다. 그래서 부산에 살 때는 일명 ‘노가다’라 불리는 막노동을 주로 했다. 몸은 고되어도 마음은 편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거칠고 불안한 일일지언정 식구들 생계를 책임질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 결혼한 지 3년째 되던 해, 유태성 씨는 고향 집에 혼자 남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가족을 이끌고 다시 송계마을로 들어온다. 서른네 살 때 일이다. 호구지책으로 친구가 하다 그만둔 구멍가게를 물려받았다. 거기서 아내는 물건을 팔고, 그는 동네 노인들이 힘에 부쳐 건사하지 못하는 땅을 도맡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때 했던 가게가 주차장상회라고, 지금도 버스정류장에 가면 간판이 보여요. 아내가 그걸 18년이나 하면서 청춘을 다 거기에 바쳤지. 나는 농사를 지었는데 한 2년 해보니까 그냥 머슴인 거라. 직불금은 땅 주인이 다 가져가고 힘만 들지 돈이 안 돼. 그래서 다시 노가다에 뛰어들었는데 내가 일을 좀 아니까 이때부터는 팀을 짜서 데리고 다니면서 했어요. 하청받아서 큰 공사도 많이 했습니다. 어느 해엔가 루사라고 큰 태풍이 와서 난리 난 적이 있거든요. 그때부터 한동안 공사가 엄청 많았다고. 내가 일한 만큼 돈을 다 받았으면 부자가 됐을 거예요. 노가다로 돈 벌려면 두 가지가 중요해요. 받을 돈은 악착같이 받아내고 줄 돈은 떼먹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거.(웃음) 나는 이 두 개를 다 못하니까 탈탈 털리고 끝난 거지. 월말 되면 집으로 전화가 계속 왔어요. 철근 회사에 레미콘 회사에 인부들까지 전부 돈 달라고. 나도 나지만 아내가 참 힘들었죠.”


막일에서부터 시작한 건축업을 접고 그는 15년 전부터 ‘보험’ 일을 하고 있다. 여느 직장인처럼 아침이면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한다. 그 사이 낮 동안은 이리저리 다니며 사람 만나는 게 일이다. 출퇴근하는 직장이라면 다 마다하던 그가 이 일을 오래 계속하는 이유는 시간을 재량껏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람 만나 상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즐거워서다.

 

“친구들이 그럽니다. 태성이가 자기한테 딱 맞는 일을 찾았다고. 보험 하면 사람들이 좀 부담스럽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누굴 만나든 부담이 전혀 없어요. 또 나를 만나는 사람도 부담스럽게 생각 안 해. 내가 천성이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은 것도 있지만 일에서도 신뢰를 주니까. 다들 잘한다고 하니 나도 이게 천직인가 보다 하죠.”

 

이장은 잘해도 잘못해도 ‘원수’ 생기기 쉬워

 

유태성 이장이 마을 일의 보람과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이장이지만 유태성 씨가 고향에 돌아온 초기, 차에 연장 싣고 새벽부터 건축 현장으로 향하던 그 시절엔 마을과 별 교류 없이 지냈다. 다만 활동적인 성향상 새마을회니 자연보호회니 하는 단체에서 일을 맡아 달라고 하면 거절할 줄 몰랐다. 더욱이 일단 일을 하면 뭐든 확실하게 해내는 바람에 그만두기도 어려웠다. 그런 연유로 새마을회 총무만 14년을 했다.

 

봉사활동을 주로 하는 단체 일과 비교하면, 마을 전반을 관장하는 이장의 일은 소소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이 많다. 행정기관과 마을을 잇는 중간자 역할이라 전달해야 할 것, 이해시켜야 할 것, 요청받는 것이 늘 쌓여 있다. 또 부모님 대부터 이웃으로 살아가는 마을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일인지라 조심스럽기도 하다. 오죽하면 친구 하나는 그에게 “이장 되면 일 년에 한 사람씩 원수 생기니 조심하라”는 말을 다 했을까.

 

“그 친구 말이 농담이 아닌 게, 이장 맡은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원수 한두 사람은 생긴 거 같아요.(웃음) 해달라는 걸 다 들어줄 수는 없거든. 절차를 따라야 하고 공정성과 형평성도 따져야 하는데 그냥 우기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다고 일일이 들어줄 수 있나? 아닌 건 아닌 거지. 그에 비하면 어르신들이 텔레비전 안 나온다, 도장 파달라 하면서 수시로 불러대는 건 오히려 맘이 편해요. 내 시간 빼서 몸으로 때우면 되니까.”

 

무엇보다 가장 머리 아픈 건 주민 간에 의견이 갈리고 마음이 안 맞을 때 그걸 어떻게 조율해서 화합하게 만드느냐다. 송계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가구 수나 인구가 훨씬 많다 보니 아무래도 나오는 의견이나 떠도는 말들도 더 많다. 게다가 도시에서 온 이주민이 단기간에 늘어나면서 마을 안에 생기는 미묘한 기류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송계마을 서하초 앞에 들어선 LH 임대주택단지. 작은학교살리기 정책으로 많은 이주민이 들어오면서 선주민과 이주민 간의 조화와 협력이 마을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송계마을은 서하면의 행정수도 같은 곳이거든요. 우리끼리는 서하면의 서울이라고 해요. 여기 임대주택 단지는 신도시라 부르고.(웃음) 딴 마을과는 상황이 달라요. 이장인 내 시각에서 보면 장점은 농사짓는 가구가 적어서 일이 좀 수월하다는 거. 반면에 사람이 많은데 다 다르니까 그 차이를 맞추기가 어렵다는 거는 단점이에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어요. 내가 이장 되고 바로 임대주택 단지 대표를 찾아가서 그랬거든요. 섬으로 남지 말고 마을 주민과 자주 어울리고 교류하면서 지내자고. 이번에 장터 준비하는 회의에 대표가 왔기에 조만간 마을 주민 다 같이 모이는 행사 한번 하자고 했어요. 자꾸 얼굴 보고 만나야지 뭐 다른 수 있어요? 그러면서 차차 친해지고 하다 보면 송계마을은 지금보다 더 좋아지고 발전할 겁니다.”

 

송계마을이 또 누군가의 고향으로 남는다면

 

어릴 때부터 야무지고 단단한 그에게 친구들은 ‘콩’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또 여기저기 재바르게 다닌다고 해서 ‘발바리’라고도 불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믿음직스럽게 일 잘하고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해갔다. 그리고 인생의 ‘달고도 쓴’ 맛을 두루 경험한 뒤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아 새로운 생의 주기에 접어든 올해, 고향 마을의 젊은 이장이 되어 이제껏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새벽 네 시 좀 넘으면 눈이 떠져요. 다섯 시쯤 되면 밖으로 나가 마을을 한 바퀴 돕니다. 쓰레기 줍고 똥도 치우죠. 태울 거 있으면 태우기도 하고. 이장 되고 나서 하루를 이렇게 시작하는데 그냥 기분이 좋아요. 솔직히 나는 이장 해서 무슨 성과를 내겠다, 그건 말이 안 된다고 봐요. 이장이 대단한 권한을 가진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거든. 동네 깨끗하게 유지하는 거, 어르신들 편하게 지내고 마을 주민들 간에 서로 화합하도록 돕는 거, 이 정도만이라도 잘하자는 게 내 생각이에요.”

 

유태성 이장에게 송계는 더 이상 옛날의 고향마을이 아니다. 부모님을 비롯해 그 연배 어르신들은 돌아가신 지 오래고, 전에 살던 집들이 허물어진 자리엔 새집들이 즐비하다. 꼬마 때부터 보아온 자녀 세대는 이미 도시로 다 빠져나가 가끔 명절에나 온다. 전처럼 세배 다니고 같이 회관에 모여 떡국 먹는 풍습이 사라진 탓에 그들이 마을에 와도 얼굴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아쉬운 점도 물론 있다. 하지만 과거에 붙들려 사는 것을 경계하는 ‘스마트’한 그는 옛사람 대신 새 사람이 들어오고 옛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자리에 새로운 추억이 하나둘 쌓여가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그 추억이 누군가의 가슴에 ‘고향’으로 남는다면 송계마을이 존재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니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어도 이곳을 고향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기를. 그들이 언젠가는 이장도 하고 서하초 선생도 하고 카페 주인도 하게 되기를. 유태성 씨의 바람은 이토록 야무지고 단단하다.


옛길이 사라지고 새로 포장된 길이 생겼듯 옛사람이 떠난 자리에 계속해서 새 사람이 들어오기를, 그리하여 송계마을이 누군가의 ‘고향’으로 남게 되기를 유태성 이장은 바라고 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함양군 서쪽 아래에 자리한 서하면. 사시사철 꽃과 나무와 물이 아름답다고 하여 화림동 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에는 오래도록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 삶의 다른 길을 찾아 걸어들어온 귀농 귀촌인들, 최근 이주해온 젊은 부부와 청년들도 있습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는 이처럼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서하를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서하다움'이란 큰 그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자 합니다.

인터뷰 및 글_자야 jayams@naver.com

사진_김한범 bombbug@gmail.com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