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운곡마을 신현숙 어르신

202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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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도 짜듯, 사과나무 가꾸듯 그렇게 살아왔지요”




1941년, 아버지 신영균과 어머니 남기분 사이에서 첫째 딸로 태어났다. 경북 문경시 가은면 민지리가 고향이다. 너 나 없이 가난했던 시절이라 어릴 때부터 명주와 비로드를 짰으며, 스무 살에 마기열 씨와 결혼한 뒤에는 줄곧 사과 농사를 지었다. 지역을 떠돌며 남의 과수원을 부치다가 땅을 사서 함양군 서하면 운곡마을로 들어온 게 1990년. “베로도 짜듯, 사과나무 가꾸듯” 한평생을 정직하게 노동하고 인내하며 살아온 신현숙 어르신의 이야기가 지금부터 펼쳐진다.



“나에게 서하란?

내 땅, 내 집에서 아들딸 장가 시집 보낸 든든한 곳.”

 

 

 서하면 깊숙한 운곡마을에 자리한 신현숙 어르신 가족의 사과농장. 지금은 귀농한 셋째아들이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안의에서 서하를 거쳐 서상으로 이어지는 육십령로. 서하면의 마을들은 대부분 공용버스가 다니는 이 국도를 따라 늘어서 있다. 버스가 삼십 분 간격으로 다녀 마을 주민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쉬운 편이다. 다만 운곡리는 예외다. 서하면에서 백전면으로 넘어가는, 이곳 사람들이 ‘빼빼재’라 부르는 고개 쪽에 자리한 운곡리 마을들은 깊숙하다. 버스도 하루에 다섯 대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그만큼 산에 가깝고 골짜기에 더 가깝다.

 

신현숙 어르신이 운곡리 중에서도 은행마을과 옥환마을 사이에 있는 운곡마을에 정착한 지는 올해로 33년째다. 이사 오던 1990년에만 해도 포장이 안 돼 있어 “서하면서부터 여까정 찔꺽거리는 길을” 어렵게 들어왔다. 작은 물도랑 하나를 뛰어넘어야 비로소 눈에 보이던 작고 허름한 집, 그리고 그 너머 비탈진 땅에 심어진 사과나무들. 과수원 일 시작한 지 약 30년 만에 얻은 ‘우리 집’이고 ‘내 땅’이어서였을까. 이제 막 오십이 된 아낙의 눈에는 그 모든 게 괜찮아 보였다.

 

“집 앞에 서서 내다본께 그래도 골짝이 아주 솔진1)  안 허고 동네가 너르고 훤하더라고요.”

1) ‘좁다’를 경상도 방언으로 ‘솔다’라 한다. (각주로 붙인 낱말 해설은 인터넷사전을 참고함)



전쟁과 가난 속, 한 줄기 햇살로 남은 기억

 

신현숙 어르신은 1941년에 아버지 신영균과 어머니 남기분 사이에서 첫째 딸로 태어났다. 경북 문경시 가은면 민지리가 고향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기를 직접 겪었지만 아주 어릴 적이어서인지 그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또래들과 신나게 논 시절이 있었을 테지만 그 역시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아홉 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학교에 간 장면만은 나이 팔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마음속 어딘가에 햇살처럼 밝고 또렷하게 남아 있다.

 

“면 소재지에 국민핵교가 하나 있었는데 거긴 멀어서 못 갔어요. 나중에 면 소재지와 우리 동네 중간쯤에 핵교가 하나 세워지니까 그때까정 못 간 애들이 뒤늦게 다 오더라고. 8세부터 13세까지 전부 일학년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건물도 온전치가 못했어요. 우리 동네에 평산 신씨가 많았는데 집안 어른들 문중회의 하던 곳을 쓴 거 같애. 내 짐작이에요. 거서 우리 조카 항렬 되는 분이 선생님을 하고 아덜은 한 구십 명 됐는가. 반을 1, 2, 3반 이렇게 셋으로 나눠서 한방에 따로따로 앉혀놓고 공부를 시켰어요. 1반은 공부 잘하는 애들, 2반은 중간치, 3반은 좀 못하는 애들. 나는 1반이었는데 그래도 일등은 한 번을 못해봤네.(웃음)”

 

그때 다니던 학교 이름도 기억한다. 문양국민학교2)다. 글씨를 쓸 줄 알고 똘똘했던 아홉 살 현숙은 그러나 이듬해 육이오 전쟁이 나면서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당시 민지리는 산골 마을이라 따로 피난을 가지는 않았다. 전쟁 중에도 대체로 조용한 편이었지만 전투가 치열하던 시기에는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소리에 종종 마을이 흔들리곤 했다. 가까운 어딘가에 포탄이 떨어지는 굉음이 울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맏이인 현숙은 동생들을 데리고 아버지가 밭에 파놓은 굴로 뛰어들었다.


2) 현재는 폐교된 학교 자리에 잉카마야박물관이 들어서 사람들을 맞고 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시는 신현숙 어르신. 기억력이 좋으셔서 묘사가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마당에 상추 심고 하던 밭뙈기가 있었는데 아부지가 거기에다 굴을 파고 나뭇가지랑 풀을 덮어놓았지요. 비행기가 ‘왕’ 하면 동생들 손목을 붙잡고 그 굴로 들어갔어요. 그때 내가 열 살, 밑으로 일곱 살, 네 살. 또 하나 있었는데 가는 전쟁 중에 잃고 나중에 남동생 둘이 태어났지. 어느 날은 저녁을 먹고 마당에 앉으니까 포 소리가 펑펑 나면서 누가 우리 집에 대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쳐요. 나가서 보니까 골목이 피난 가는 사람들로 난리인 거라. 그래 할매랑 엄마랑 나도 아 하나씩 업고 저짝 산 밑으로 도망을 갔어요. 포알 소리가 멈춰서 다시 동네로 돌아오니까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워서 사랑방에서 혼자 주무시고 있더라고.(웃음)”

 

전쟁이 휴지기로 접어들고 나서도 아이들 대부분은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집마다 먹고사는 데 급급해서 아이 고사리손 하나도 아쉬웠던 탓이다. 당시 상주와 문경에는 누에에서 실 자아 명주 짜는 일을 하는 집이 많았다. 현숙도 열한 살 때부터 그 일을 했다. 그러다 열다섯 되던 해부터는 ‘베로도’3)  짜는 일을 시작했다는데.


3) 비로드의 사투리. 짧고 고운 털이 촘촘히 심어진 작물을 말한다. 비로드는 포르투갈어 veludo의 한국식 표현으로 빌로드, 벨벳이라 칭하기도 한다.


 

“민지리에 일본 갔다 오신 어른들이 계셨는데 그분들이 자기 집에다 베로도 베틀을 한두 개라도 놓고 돈벌이를 한 거예요. 나는 민지1구에 살고 있었는데 2구에 그런 집이 많아서 거 가서 먹고 자고 하면서 그걸 배웠지.”

 

‘찰칵찰칵’ 소리에 꽃 같은 세월은 흐르고

 

명주 짜던 솜씨가 있어 소녀 현숙은 비로드 일도 빨리 배웠다. 처음엔 실 감아 꾸리 만드는 보조 일을 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베틀 앞에 앉을 기회가 생기면서 그 자리를 꿰찼다. 일은 금세 몸에 익었지만 정해진 노동시간 없이 무조건 하루에 치마 한 감씩 짜놔야 한다는 게 힘들었다. 하루 세끼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놓고는 온종일 베틀에 묶여 있었다 할까.

 

이렇듯 앞뒤 꽉 막힌 생활 속에서 그나마 숨통을 틔워준 건 같이 기숙하며 일하던 친구들이었다. 다들 비슷한 또래여서 서로 눈만 마주쳐도 괜히 좋았다. 돌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온다는 열여섯 열일곱 나이니 왜 안 그랬겠는가.

 

“한창 장난칠 나이잖아요, 그때가. 우리도 밥 먹으면서 괜히 쿡쿡 찌르고 웃어쌌고 그랬어요. 그런데 하루는 삼촌이 날 부르더니 대구엘 가재요. 거기 가면 하루에 똑같이 일해도 백 원은 더 벌 수 있다고. 그래가지고 열일곱에 대구 어느 집에 가서 먹고 자고 하면서 베로도 일을 했어요. 베틀이 일곱 댄가 되더라고. 베로도는 찰칵찰칵 발로 밟는 걸 세 번 하고 철사를 찡기거든요. 그 철사를 뻬빠4)로 닦으면 쏙 빠지면서 그게 털이 되는 거라. 베로도는 맨지면 북슬북슬하잖아요.”


4) 사포의 비표준어. 사포는 물체의 겉면을 갈아 부드럽게 하거나 녹을 문질러 닦는 데 쓰는 천이나 종이를 말한다.


 

3년이 흘러 어느새 열아홉이 되었다. 그러자 이제 시집갈 때가 되었으니 집에 와 있으라는 부모님의 명이 떨어졌다. 몸도 마음도 훌쩍 자라 성인이 된 신현숙은 대구를 떠나 다시 문경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도시나 시골이나 삶은 달라질 게 없었다. 동네에서도 비로드 짜는 일을 계속했기에 여전히 하루는 찰칵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고 닫혔다.


 

 









 

 ‘베로도’ 짜던 시절, 젊은 현숙의 꽃 같은 얼굴. (옛날 사진은 모두 신현숙 어르신이 제공함)


스무 살 되던 해, 신현숙은 대구에서 만난 남자 마기열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 이듬해, 스무 살 신현숙은 마침내 부모의 원대로 ‘시집’을 가게 된다. 부부의 연을 맺은 마기열 씨는 대구에 있을 때 알고 지냈던 사람이다. 같은 집에서 같은 일을 하던, 말하자면 나이 네 살 많은 직장 선배였던 셈. 그 남자가 진작부터 현숙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지 어느 날 불쑥 문경 집으로 찾아왔고, 이는 당시에 드문 ‘연애 사건’으로 회자되며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졌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어른들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이웃들 알까 남사스럽다고. 요새는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때는 연애만 해도 다른 사람한테 시집가면 안 되는지 알았거든요. 그 양반도 태어나기는 의성 시골서 났는데 어른들이 다 대구에 나와 있어서 결혼하고 거 가서 살았어요. 시조모에 시부모님과 시동생 네 명, 그리고 우리 둘까지 모다 아홉이었지.”

 

죽은 땅 살리며 이어온 사과 농사, 그 보람과 설움

 

다들 어려웠던 시절, 먹고사는 게 지상과제다 보니 갓 결혼한 부부라 해도 신혼생활을 누릴 물질적 심리적 여유가 없었다. 또 입은 많은데 일할 수 있는 이는 턱없이 부족하여 새댁 신현숙은 다시 비로드 짜는 일에 뛰어들게 된다.

 

몇 개월이 지나자 시할머니께서 쌀 닷 되를 내주며 분가를 시켰다. 열 달에 만오천 원 하는 방을 얻어 남편은 날품팔이로 일하고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비로드 짜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 친정집에 가서 첫아들을 낳고 돌아와 3년쯤 지났을 때 일이다. 하루는 남편 친구 하나가 찾아와 “시골 가서 일하면 이보다는 낫게 살 수 있다”며 남편에게 당장 자기와 함께 가자고 했다. 그가 말한 곳은 의성의 어느 사과 과수원이었다.

 

“우선은 바깥양반만 친구를 따라가고 나는 남기로 했어요. 옷 보따리를 싸주면서 내가 그랬지요. 열흘간 일을 해보고 계속 하겠거든 하고 못하겠거든 다시 대구로 오소. 그러고 났는데 그 열흘이 참말로 긴 거라. 아는 홍역에 걸려서 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때 당시 보리쌀 찧을 때 제일 늦게 나오는 고운 거, 그걸 한 푸대씩 사다가 빵을 쪄먹었거든요. 그러다 어느 날은 전에 무밭 일 거들어주고 얻은 무로 골짠지5) 만들어놓은 게 쪼매 있길래 그걸 가지고 나가 팔았어요. 내가 아를 업고 파니께 어느 아주머니가 사주더라고. 그래 그 돈으로 밀가루 빵을 하나 사서 먹인 게 기억이 나요. 보릿가루 빵만 먹이다가 밀가루 빵을 주니께 아가 얼매나 맛있게 잘 먹던지….”


5) 무말랭이의 방언인 ‘곤짠지’를 의미한다.



열흘이 지나도 남편이 오지 않기에 과수원 일이 할 만한가 보다 했다. 떠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자 점점 궁금하고 애가 탔다. 애 딸린 여자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던 신현숙은 친정에 가서 두 계절을 보내고 결국엔 “마 서방 찾으러 가자”는 할머니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길을 나선다. 주소 적힌 쪽지를 들고 물어물어 찾아가니 의성 어디 높은 산에 일궈놓은 과수원이었다.

 

그날 어슴푸레한 저녁 무렵 해후한 부부는, 그 후로 줄곧 사과 농사를 짓게 된다. 산 위 과수원을 시작으로 처음 몇 년은 남 일을 돕다가 그다음부터는 과수원을 통째로 빌려 농사를 도맡아 했다. 처음 해보는 과수 농사는 고되었다. 당시만 해도 기계나 설비에 의존하는 대신 오롯이 몸을 써야 했기에 물 주고 약 주는 것만 해도 ‘큰일’이었다고.


“지금은 호스로 다 하지만서도 전에는 나무 하나마다 칸칸이 두둑과 도랑을 만들어서 물을 줘야 했거든요. 또 그때는 조피6)라고, 칼로 뚜두룩7)한 나무 껍데기를 일일이 긁어서 그 안에 든 벌레를 없앴어요. 약 한 번 주려면 유황을 몇 포대기 갖다가 물에 섞어서 계속 끓이고 젓고. 아휴, 말도 못 하게 힘들었지. 나는 약 태우다가 쫓아가서 줄 잡아주고 아 울면 유모차 흔들어서 달래주고. 그러다 젖이라도 먹이려면 열두 번도 손을 더 씻었어요. 때마다 식사 준비에 참 준비하는 것도 일이었고.”


6) 나무의 겉껍질을 긁어서 그 안에 든 벌레를 퇴치하는 방법.

7) 뚜두룩은 두드러기의 방언으로, 여기서는 두드러기처럼 울퉁불퉁 올라온 모양을 가리키는 듯하다. 



결혼한 지 몇 년 후부터 시작한 사과 과수원 일은 고되었다. 그래도 남편 친구들이 많이 도와준 덕분에 살길을 찾을 수 있었다고. (사다리 맨 위에서 일하는 이가 신현숙 어르신이다.)


그래도 사과 농사는 다른 작물과 비교해 수입이 좋아서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어느새 넷으로 불어나 점점 커가는 자녀들을 보면 없던 힘도 솟아났다. 다만 내 땅이 아니어서 겪는 설움이 참으로 컸다. 두 사람이 어떻게든 돈을 모아 땅을 사고자 한 이유다.

 

“형편없는 땅을 좋게 만들어놓잖아요? 그러면 누군가 꼭 그걸 탐을 내요. 내가 돈 더 줄게 해서 주인한테 우리를 쫓아내게 한다고. 그래서 여기저기 옮겨 다닌 적이 얼매나 많게요. 의성에서 군의 갔다가 거서 또 안동 풍천에 가고. 예천에서는 참말로 다 죽어가는 땅을 우리가 살려냈어요. 물도랑 새로 만들고 나무에 벌레가 드글드글한데 그걸 일일이 잡아내고. 정말 내 밭 같이 가꿨놨는데 한 해 지나고 나니께 동생이 와서 농사짓는다고 나가래요. 그때마다 참 남편 친구들이 우릴 많이 도와줬지. 도지8)할 때 돈 모질라면 빌려주고 실농해서 갈 데 없어지면 다른 데 알아봐주고. 그 양반들 덕분에 예까지 왔지요. 그 생각만 하면 진짜 너무 고마워.”


8) 조선 말기, 한 해 동안 돈이나 곡식을 얼마씩 내고 남에게 빌려서 쓰는 논밭이나 집터를 이르던 말.


 

“서하 오고 이사 안 갔으니께 그만허면 잘 산 거지”

 

경기도 이천 어느 과수원을 빌려 5년 일한 것을 끝으로 부부의 떠도는 삶은 비로소 막을 내린다. 1990년 3월, 서하면 운곡마을에 7천여 평 땅을 사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결혼하고 사과 농사 시작한 지 몇십 년 만에 얻은 큰 결실 앞에서 부부는 얼마나 기쁘고 가슴 벅찼을까.

 

그러나 사람 사는 게 늘 그렇듯 찬란한 순간은 짧고 일상의 의무와 책임은 가볍지 않다. 모시고 들어온 늙은 시부모에, 도시에서 자취하며 학교 다니는 자녀 둘에, 아직 돌봐야 할 사람이 많았다. 앞으로 자식들이 차례대로 결혼도 할 테니 그 역시 염두에 두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방치되어 있던 땅을 손봐서 얼른 사과 농사를 시작해야 돈을 벌 수 있기에 몸도 마음도 마냥 분주했다.

 

“우리가 3월 9일에 들어왔는데 사과나무를 보니까 어떻게나 가지가 많은지 바글바글해. 내 주먹 하나가 안 들어가도록. 전지할 때를 놓친 거지요. 그래 집 양반이 얼른 친구들을 불러다가 이사 온 이튿날부터 전지를 했어요. 또 땅이 경사가 심하고 군데군데 나무가 죽어서 빈터도 많더라고. 그 많은 일을 한꺼번에는 못허니께 급한 것부터 하나씩 했어요. 땅 깎아서 편편하게 하고 묵은 나무 베어내고 새로 심고 하는 건 시간이 걸렸지요.”

 

1990년, 수십 년을 떠돌아다니며 일하다 마침내 땅을 사서 들어온 서하 운곡마을의 옛집 전경.


현재 어르신이 살고 계신 집. 진입로에서 보면 맨 뒤 붉은 지붕이 집이고 양옆으로는 창고와 저장고 등이 있다.


식구들의 보금자리를 새로 마련하는 것도 급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과수원 초입에 집이 있긴 했으나 방 두 칸이 전부였다. 심지어는 부엌도 없어 “가재기9) 달아내서 밥솥 걸어 겨우 밥만 해 먹었”을 정도였다고. 거기서 시부모에 과수원 일 거드는 둘째 아들까지 함께 산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9) 가지(원줄기에서 갈라져 나와 뻗은 줄기)의 방언으로, 여기서는 본래 건물에 달아내서 지은 공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선은 공사 기간이 짧은 조립식 패널 집을 짓기로 했다. 가을에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설에 집이 완공되자 동네 사람들이 모여 꽹과리 치고 북 두들기며 요란하게 축하를 해주었다. 여자들은 곱게 한복까지 차려입었다. 그러고는 무리 지어 동네를 한 바퀴 도니 어떤 집은 쌀을 퍼담아 주고 어떤 집은 돈 봉투를 내주었다고.

 

“공사할 때만 해도 몇 년 살다가 부로꾸10) 집으로 다시 지어야지 했는데 그만 30년을 산 거야.(웃음) 지금 이 집은 일 년 좀 넘었나, 그거밖에 안 돼요. 우야든동 맨 처음 집 지었을 때 동네 사람들이 참 인심 좋게 많이 와줬어요. 당시엔 그런 풍습이 있어서 우리도 마을에서 행사를 하거나 누구 집에 일이 생기면 쌀이나 돈을 내고 했어요. 일 년에 한 번씩은 마을 앞 느티나무 아래 모여 잔치도 했고. 젊은이들이 밥해서 어른들 대접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랬지. 이웃들이 우리 과수원 일도 많이 도와줬어요. 여 오기 전엔 친구들 덕을 봤다면 여서는 이웃들 덕분에 산 거지요. 서하에서는 뭐 크게 힘든 건 없던 것 같애요. 이사는 안 갔으니께.(웃음)”


10) 블록의 경북 방언.


 

매 순간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으므로

 

서하에 들어와 살면서 가장 기뻤던 건 자녀 넷 모두 결혼시키고 손주들 본 일이다. 큰아들은 이사 온 바로 그해에 결혼해서 일가를 이루었고, 한창 땅 개간하고 나무 살리느라 애쓰던 시기에 힘이 되어주었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십 년간 일을 배운 후 독립해 지금은 제 식구들과 강원도에서 역시 사과 농사를 짓고 있다. 서하 시절 초기에 대구서 공부하던 셋째아들과 막내딸도 이미 결혼해서 독립한 지 오래고, 더욱이 셋째는 십여 년 전 함양으로 귀농해 부모가 하던 과수원을 이어가는 중이다.

 

“다들 밥은 안 굶고 살지만 그래도 며느리들 생각허면 미안해. 특히 시골 사는 며느리들. 저이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남의 집 귀한 딸덜 시골에 데려와 고생시키는 거 아닌가 해서 그냥 내 기분이 그래요. 이제는 부모가 둘 다 늙고 아파서 큰 도움이 못 되잖아요. 저 양반은 당뇨로 고생하고 나는 혈압이 높고 다리가 아프니 혼자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그러니 뭘 바라겠어요. 그저 너무 오래 고생 안 하고 아이들 너무 애 안 멕이고 조용히 잘 가는 거, 그거지.”


 생의 고비들을 하나씩 넘기면서 그만큼 깊어진 주름 사이로, 이제는 평온이 물처럼 흐른다.


지난 생을 돌아보면 “크게 좋은 것도, 그렇다고 크게 나쁜 것도 없었”다고 신현숙 어르신은 말씀하신다. 그건 어쩌면 삶에 바라고 기대하는 게 별로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어르신 세대가 대개 그러하듯이 어려서부터 너무 일찍 철이 드는 바람에 집안 사정과 어른들 마음은 헤아리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욕구와 갈망은 들여다보지 못했다. 더욱이 십 대 이후로는 줄곧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뭘 하고 싶다든가 뭐가 되고 싶다든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래도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고, ‘베로도’를 짜듯 사과나무를 가꾸듯 온몸과 마음을 쏟아부으며 인내한 삶이었다고 자부한다. 포기와 일탈 없이 매 순간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용기 있게 해냈다 할까.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건 없었어도 결국은 그 모든 감각과 마음과 순간 들이 쌓여 삶을 이루었기에, 신현숙 어르신에게는 후회도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다. 다음 생은 이보다 더 좋았으면 하는 소박한 욕심조차 생기지 않는다. 유언을 남긴다면 다만 이렇게 쓰고 싶을 뿐.

 

“우리 자식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서로 소통하면서 화목하게 살길 바랍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

함양군 서쪽 아래에 자리한 서하면. 사시사철 꽃과 나무와 물이 아름답다고 하여 화림동 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에는 오래도록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들, 삶의 다른 길을 찾아 걸어들어온 귀농 귀촌인들, 최근 이주해온 젊은 부부와 청년들도 있습니다. '서쪽아랫말_사람_이야기'는 이처럼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기로 서하를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서하다움'이란 큰 그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자 합니다.


인터뷰 및 글_자야 jayams@naver.com

사진_김한범 bombbu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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